일상생활이 곧 신앙생활
영산마을 신자들은 바쁜 농한기 때도 충실히 주일미사에 참례하며 신앙을 지켜왔다. 이날 미사에는 영산본당(주임 홍금표 신부) 관할 곤의골공소(회장 조용춘) 신자들도 함께했다. 영산성당 인근 곤의골공소 신자들은 현재 5가구에 불과하지만 매월 셋째 주 영산본당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는다. 신자들 대부분이 구교집안 출신이라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특별한 친분이 없어도 어느 집안에서 누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안다. 이웃에게 고민과 어려움이 생기면 당장 찾아가 도와주는 게 일상이다.
미사 후 영산성당 앞마당에는 따뜻한 햇살이 내려앉았다. 신자들은 봄을 만끽하며 농사에 대한 계획을 나누고 있었다. 유난히 웃음이 많던 김정숙(마리아·59)씨는 올해 부추, 벼, 도라지, 옥수수 등을 심기로 했다. 옆에 앉은 이주순(루치아·72)씨는 벼, 옥수수, 무, 고추 등을 재배하는데, 김씨의 일이 바빠지면 당장 달려가서 도와준다. 이씨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아왔던 터라 바쁜 농한기에도 주일미사를 거른 적이 거의 없다. “주일엔 부모님들이 아무 것도 못하게 했어요. 빨래도, 밭일도 못하게 했죠. 그러다보니 할 일이 없잖아요. 주일만 되면 어르신들이 늘 어떤 집에 모여 담소를 나눴어요. 그게 참 재미있었죠.”
▲ 영산성당 인근 곤의골공소 신자들은 현재 5가구에 불과하지만 매월 셋째 주 영산본당 주일미사에 함께 한다. 사진은 3월 29일 영산본당 주일미사 모습.
▲ 장주기요셉재활원 점심식사 중 홍금표 신부(오른쪽)가 신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생명농업, 희망을 짓다
영산마을은 지난 1990년대 호저생협(현 원주생협)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친환경농업을 실천해왔다. 화학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쌀, 감자, 옥수수, 복숭아 등 생명농산물을 수확해 두레생협연합회 고양파주두레생협, 의왕두레생협, 원주생협 조합원 등지에 직거래로 공급한다.
마을 토박이 이향자(모니카·48)씨는 영산마을이 청정지역이라며 “생명이 살아 숨쉬는 땅으로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경지를 정리하면서 사라졌던 메뚜기와 미꾸라지도 돌아왔다.
38년 동안 농사일에 종사해온 원주생협 영산작목반 이영철(마태오·62) 반장은 우렁이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는 등 친환경농업을 실천해오고 있다. 지금은 13만2231㎡의 논과 6만6115㎡의 밭, 1만6528㎡의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생산하는 7가구의 수확물을 관리한다.
풀과의 전쟁이라 할 수 있는 농사에서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작물을 수확할 수 있었던 것은 우렁이 농법 덕분이었다. 우렁이는 풀을 좋아하는 대식가라 벼와 함께 자라는 풀을 제거해준다. 우렁이 농법으로 수확한 벼는 생명력도 강해져 해충 대항력도 높아진다.
이 반장은 “약정한 생명농산물을 안전하고 책임있게 생산하고 소비하는 관계를 이어나가 후손들에게 물려줄 땅을 지속가능한 농토로 보전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생명이 곧 희망’이라며 입을 모았다.
▲ 성당 앞마당에서 봄을 만끽하며 농사에 대한 계획을 나누고 있는 신자들.
버려진 땅에 감자 심기
“정식이네가 감자를 잘라놨어. 그냥 심기만 하면 돼.”
“나 집에 가서 장화 신고 올게.”
영산본당 요셉회 신우균(보나벤투라·80) 회장이 미사 후 감자를 심으러 간다며 신자들에게 함께 가자고 종용했다. 영산성당에서 700m 떨어진 장주기요셉재활원(원장 홍금표 신부)에서 점심을 먹고, 이어 감자를 심는다는 얘기였다. 재활원 뒤편에는 1500평 남짓한 땅이 있는데, 그냥 내버려두면 잡초만 무성해져 이 땅을 활용하기로 한 것.
점심식사가 끝나자 회원들이 농기구를 들고 삼삼오오 모였다. 안상현(요한·62)씨가 트렉터를 몰고 땅을 갈아엎었다. 안씨는 청각장애인이지만 본당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숨은 일꾼이다. 신 회장이 한 마디 덧붙였다.
“말은 못해도 눈치는 백단이여. 아주 일도 잘하고 열심히 하지. 트렉터 없었으면 오늘 노인네들이 어떻게 이걸 다하겠어.”
트렉터를 모는 안씨의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혔지만 얼굴엔 평화로움이 가득했다.
한 쪽에선 송병선(요한·83) 할아버지가 비료를 뿌린다.
“밑거름이지. 감자 잘 나라고 뿌리는 거여.”
송 할아버지가 비료를 뿌리고 지나간 자리에 이어 가축분 퇴비가 뿌려진다. 거름냄새가 진동했다.
“막걸리도 안 사오고 뭐하누.”
거름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 송 할아버지가 회장에게 애정 어린 핀잔을 줬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막걸리와 새참이 도착했다. 막걸리를 시원하게 들이킨 송 할아버지는 옆에 있는 그루터기에 걸터앉았다. 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농사꾼으로 살아왔다고 말했다.
“해가 지면 잠자고, 해가 뜨면 일어나잖아. 우리 농사꾼들도 그렇게 사는 거야. 죽고 새로 태어나는 건 자연스러운 거지. 예수님도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셨잖아. 그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하느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못하는 일이 없으시지. 농사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야.”
씨를 뿌리고 수확할 때가 가장 기분이 좋다는 송 할아버지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여름 내내 일하고 겨울엔 쉬는 거지. 봄이 왔으니 이제 밖에 나와서 일하는 거야. 사람도 잠에서 깨어나는 거지. 오늘처럼 일을 하니까 잡념이 없어져. 하느님이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김정식(요한·70)씨는 이날 감자파종을 위해 집에서 20kg에 달하는 감자를 잘라왔다.
“1주일 전부터 준비했죠. 봉사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못했을 겁니다.”
김씨가 거름이 덮인 땅 위에 비닐피복기로 필름을 입히자, 그 뒤를 따라 감자파종 작업이 이어진다. 둘씩 짝지어 박자를 맞춰 파종기로 감자를 심는다.
농약을 치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신자들이 수시로 와서 풀을 뽑기로 했다. 누가 언제 와서 풀을 뽑을지 정하지는 않는다. 신앙공동체라는 끈끈한 유대 안에 서로를 믿으며 일을 분담하는 것이다.
어느덧 감자파종이 끝났다. 고된 노동에도 회원들은 서로 웃음을 잃지 않고 수확에 대한 희망을 키웠다. 겨울이 자리를 내어주고 땅은 생명을 머금는다.
▲ 김성우(시몬·78)씨와 홍명숙(아녜스·63)씨가 감자파종을 하고 있다.
▲ 김정식(요한·70)씨가 거름이 덮인 땅 위에 비닐피복기로 필름을 입히고 있다.
▲ 회원들이 새참을 즐기고 있다. 뒤편에 장주기요셉재활원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