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앙리 도리 김신부는 1839년 9월 23일 프랑스 방데(Vendee)지방의「성힐레르 딸몽」이라는 대단히 작은 바닷가 어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의 오막살이 바로 옆에 있었던 소금을 만드는 염전과 농사일을 하면서 겨우겨우 끼니를 이어갔던 매우 가난한 부부였다.
김신부는 이들의 여섯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물론 그 가족들은 학식을 많이 갖지 못했으나 그 지방의 순박한 대부분의 노동자들 처럼 대단히 신앙심이 깊었고 종교행사나 신심생활이 그들 생활의 전부였다. 그러므로 김도리신부도 어린시절을 평화롭고 신심깊은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김도리신부의 어린시절에 그에게 늘 관심을 쏟아준 분은 바로 그곳 본당의 보좌신부였다. 어느날 이 보좌신부는1852년에 김도리신부 부모의 승락을 얻어서 소년 도리를 신학교에 입학시키려고 추천했다.
그리하여 1852년 10월 김도리는 소신학교에 들어가 8년동안 모든이들 한테서 칭찬과 귀여움을 받으며 지냈다. 15세때 그는 자신의 소명을 외방지역의 선교에 두고 1860년 10월에 뤼송(Lucon)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김도리신부는 근면하고 온순하였으며 특히 고행을 좋아하였고 성실하고 너그러웠고 특히 수도생활에 대한 동경심이 대단했다는 것이었다. 1861년 12월 21일 삭발례를 받은 그는 1862년 6월 14일 빠리외방전교회에 입회를 청원하였다.
그러나 그의 건강을 알고있었던 친지나 본당신부는 극구 말렸으나 결국 그는 완곡히 반대했던 본당신부를 설득했다. 또다시 김도리신부는 부모들의 반대에 봉착했다. 특히 그의 모친에 반대는 그에게 큰 고통이었으나 그는 모친을 설득하기 위해서『어머님! 외국선교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에게 있어 진실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8년동안이나 이 소명에 대하여 제 맘속에 생각해 왔었습니다.
하느님이 저의 마음속에 말씀하셨으니 저는 그분께 순명해야 합니다.』아무리 말려도 헛수고 라는 것을 안 그의 부모는 결국 1864년 5월 31일에 사제서품을 받고 조용히 장상들의 결정이 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내 6월 15일 한국의 선교신부로 결정이 되자 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는 백신부ㆍ서신부ㆍ민신부와 함께 1864년 7월 19일「마르세이유」에서 배를타고 출발하여 수많은 어려운 항해 끝에 드디어「홍콩」에 도착하였다가 다시 요동지방에서 대기하면서 조선입국을 기다렸다.
그가 다시 그곳을 떠나 그의 동료들과 함께 백령도에서 내포지방에 도착한 때가 1865년 5월 27일이었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 경기도 용인 손곡리에서 한국말을 배우면서 그곳 교우들과 함께 지냈다. 마침 1866년 2월에 대박해의 소식과 장주교의 체포소식을 들은지 며칠후에 그 자신도 1866년 2월 27일에 체포되고 말았다.
물론 김도리신부는 체포되기 전에 박해의 소식을 듣고 우선 같이 있었던 복사를 피신시키고 다른 교우들을 위험스럽게 할 수 있는 모든 문서와 물건들을 감춰버리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포졸들은「하우고개」에 있었던 서볼리외신부를 체포하고 같은날 산등성이 하나 너머에 있었던 김도리신부를 체포해서 서울로 압송하였다. 이에 의금부 옥에서 김도리신부는 장주교와 다른 동료신부들을 만났다. 즉시 문초가 시작되면서 죄수들에게 내리치는 형을 예외없이 받았다. 3월 5일 문초에서 관리들이 본국에 송환하겠다고하자 그는『이 나라에 머무는 동안 말을 배웠으니 죽었으면 죽었지 돌아가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사를 표하였다.
그 다음날도 꼭 같은 문초가 계속되었고 모든 문초와 심문은 개별적으로 진행되어 누구가 잡혔는지, 누가 얼마나 형벌을 받았는지 서로 알지 못하게 하였다. 결국 장주교와 같은날 사형선고를 받고 역시 같은날 장주교와 여러 동료신부와 3월 7일 사형이 집행되는 날 의금부 옥에서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갔다.
수많은 군중들이 길에서 욕설을 퍼부었고 그들은 사형수들의 가마에 두다리를 뻗혀 묶였고 팔은 힘껏 뒤로 제쳐 가마에 동여매였으며 그들의 머리카락도 풀어 뒤로매어졌으며 한사람 한사람에게「사학죄인 서양인 누구」라고 한자로 쓴패를 매달았다.
사형장에 도착하자 총책임자인 이현직 앞에 세워져 귀에 화살이 꽂혀지고 얼굴에 물을 뿌린 다음 회를 쳤고, 겨드랑 밑에 몽둥이를 끼어 치켜들어 사형장을 세바퀴 조리 돌리는 것이 국법이었으나 그날은 한바퀴만 돌았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장주교를 위시해서 차례차례 참수되었다.
목격했던 한교우의 증언에 의하면「김도리신부는 눈을 내리뜨고 참된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순교자로서의 당당함을 보여주었다」고 전하였다. 김도리신부는 이날 순교자들 중에서 맨마지막으로 처형되었는데 두번째 내리치는 칼날아래 순교의 영관을 천상제단에 바치었다. 그때 그의 나이 27세였고 때는 1866년 3월 7일 이었다. 그의 시신 역시 다른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교우들에 의해 와고개에 안장되었다.
<修女ㆍ한국순교복자회ㆍ오륜대순교자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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