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전장운 요한은 1811년에 서울 애고개에서 태어났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은 승연이었다. 그는 그의 열심한 모친에게서 영세를 받았으며 어렸을 때 부친이 별세했기 때문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수공업인 가죽부대와 담뱃대를 만들어 파는 등 장사일도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1839년 기해년 대교난때 체포되었는데 그때 그는 신앙심이 굳지못해 감언이설에 빠져 순간적으로 배교하여 풀려 나왔었다. 이때부터 그는 슬픔과 참회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조선에는 성직자가 없는 오랜시대를 지냈기 때문에 언제나 그는 희망을 버리지않고 신부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희망한대로 1845년에 김대건 신부가 입국하자 그는 곧 참회 회개하여 고백성사를 받고 그때부터 다시 모든 신심행사에 열성을 다하여 깊은 신앙심으로 종교생활을 하였다.
많은 교우들도 그의 열심에 감복하여 그에 대한 존경심이 두터웠다. 그는 그후에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고 화목하게 살았는데 장베르뇌주교는 그의 열심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익히보았다가 그에게 성세를 베푸는 권한을 주었고 1866년에는 최형(베드로)과 함께 그때 교회서적을 출판하는 출판소업을 맡겼다. 그들이 막 이 작업을 시작할 무렵 전 집주인 임요셉은 박해가 일어난 것을 알고 곧 피신해버렸으나 그는 박해가 일어난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남아있어 그가 맡은 많은 목판을 사수하였다. 다른 교우들이 그에게 피신하기를 권유했으나 그는『내가 어느곳에 피신한다해도 하느님이 부르시면 나는 체포될 것입니다. 여기서 체포되나 다른 곳에 피신했다가 체포되나 무엇이 다릅니까? 그러나 나는 지금 교우들의 생명과 같은 귀중한 이 목판을 어떤 불행이 닥쳐 오더라도 사수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가 체포될 때 그의 나이는 56세로 1866년1월 15일(음력)장주교가 체포된 7일후에 그도 체포되어 포도청에 압송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곧 최형과 함께 교회서적출판의 죄목으로 문초받기 시작하였다. 심문관들은『너는 도망간 창동 임생원의 집을 지켜주었던 것을보니 평소에 그와의 친분을 알수있는데 임가가 어디로 도망갔는지 실토하고 배교하여 살아남는 것이 어떤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그는 『나는 이문동에 살면서 장사로 생계를 삼았고 아현동에 살았던 황생원에게 30년전에 천주교를 배웠습니다. 그후 장주교님을 정의배 집에서 만난 후 수년동안 천주님을 섬겼는데 어찌 배교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임생원은 제 목숨을 살리기 위해 도망간 사람인데 피신처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밖의 일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뢸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날 그는 최형과 함께 채창이란 고문을 받았다. 채창이란 어깨와 발가락을 때리는 형벌로、발가락이 부러지고 무릎뼈와 어깨뼈가 으스러졌다. 그러나 그는 이미 드러난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고 굽히거나 물론 배교 하지도 않았다. 그가 주관했던 출판소 일은 정부에서 중요시 했던 것이므로 그는 다시 최형과 함께 1월 18일에 문초를 받았다. 『너는 남의 집을 지켜주면서 그 집 주인의 성이 임(任)가 인지도 모르며 더욱이나 행방조차 모르다니 말이 되는가?』라고 묻자『그 사람은 임(林)가로 이름이 치화(致和)라고 들었지만 그밖의 것은 알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네가 10년전부터 안다는 사람의 이름을 잘 모른다니 곧이 듣겠는가?』
『저는 본래 무식하여 그런 것을 잘 모릅니다』『그렇게 무식한 놈이 성교를 어떻게 배웠는가?』『언문이야 누구나 다 아는 것이 아닙니까? 언문으로 된 성교책을 통해 배웠습니다』『이 무식한 놈아、이제부터 배교한다면 살려주겠으니 배교하겠는가?』『죽으면 죽었지 배교할 수가 없습니다』
이상이 포도청의 문초기록에 나타난 그의 심문내용이다.
그는 끝까지 임씨의 집지켜 주는 사람으로 정부에서 알게하였다. 그날 그는 11대의 곤장을 맞았으나 태연하였다. 1866년 3월 9일(양력) 최형과 함께 그의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들의 사형집행문에는『죄인 전장운과 최형은 이단과 결탁하여 서양종교에 빠졌으며 사학서(邪學書)들을 대량출판하여 전파하고 선전하였으며、국가에서 엄금하는 사교(邪敎)를 철석같이 믿어 혹독한 형벌을 받아도 뉘우치는 기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만번 죽어도 돌이킬 수가 없다고 하니 법대로 사형에 처하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다음날 3월 10일에 서소문밖에서 그의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목을 베는 회광이가 전에 교우였던 고성칠로 그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내 어찌 차마 당신 목을 벨수가 있겠오?』하며 거절하려고하자 그는『당신은 임금에게 복종하는 것이고 나는 하느님께 복종하는 것뿐인데 무엇을 꺼리오. 어서 치시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결렬한 생명의 제사를 전능하신 분에게 바치었다. 그의 시체는 아내의 손에 의해 3일 후에 정성껏 거두어져 안장되었다.
때는 1866년 3월 10일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修女ㆍ 한국순교복자회ㆍ 오륜대순교자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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