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절부터 이때까지 친구라고는 미스공 하나밖엔 상대자가 없던 미희는 이웃에 산다는 여대생과 함께 동네의 골목을 누비며 다니는 일이 재미있었다.
피난갔던 사람들이 쏠쏠하게 들어와 있다고는 해도 아직은 텅 빈 집에 노인 혼자서 지키고 있는 곳이 많았다. 미희네처럼 살던 집이 타버려서 아는 집에 빌려들고 있는 경우도 있고 애당초 집없는 영세민들이 허락도 없이 남의 빈집 한 모서리를 빌어 우로를 막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정오무렵이 조금 지나서 찾아든 어느 비교적 큰 한옥에서 미희네는 뜻밖에도 웬 젊은 장교 한 사람과 만났다.
그는 친구네 집이 무사한지 어떤지 궁금해서 일선에서 오는 길로 들렸다면서 미희들을 보자 거의 함성을 지를 듯이 반가와 했다.
그는 오랜 일선생활에서 후방이라고 출장은 나왔으나 젊은 여성이라곤 별로 눈에 띄지않던 참에 이렇게 둘씩이나 되는 여대생을 만나니 여간 신나지 않는다고 서슴없이 털어내며 큰소리로 웃어 젖혔다.
미희는 아무리 오랫동안 집안에만 같혀 있었다 해도 초면에 그리도 게걸스레 덮쳐오듯 반기는 그에게 호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 한명의 여대생은 그 젊은 장교만큼이나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다. 어디가서 차라도 하자고 젊은 장교가 제의하자 미희는 일하는 중이라고 딱 잡아떼며 외면해 버렸다. 그는 추근추근 그녀들 곁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빈 집이 아닌 집을 찾아 이리저리 다니는 중에 마침 미희네 집 근처를 지나게되었다. 그때 미희와 나란히 걸어가던 여대생이무심히 그에게 말했다. 여긴 미희씨네 집이에요. 우리집은 바로 조기 푸른 대문 집인데 여태 둘이다 통 모르고 지났어요. 아、그렇습니까. 그참 진작 아셨더라면 덜 외로우셨을텐데、하고 젊은 중위는 활달하게 받더니、그럼 저는 여기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둘에게 절도있게 경례를 붙였다. 미희는 찰거머리처럼 붙어다닐줄만 알고 속으로 염증을 느낄대로 느끼던 그가 뜻밖에도 선선히 떨어져 나가는게 여간 홀가분하고 다행스럽지 않았다. 순실이라는 이름의 여대생은 미진한 얼굴로 작별을 고했다.
미희네가 소정의 책무를 다 마친 시각은 예상보다 늦었다. 어느새 저녁 때가 다되어 있었다. 미희는 그래도 오랜만에 즐겁게 봉사활동을 하고난 기분이 개운하게 상쾌했다. 빨리 돌아가서 저녁밥을 지어야지.
그녀는 어머니가 시장에서 돌아오셨을 것만 같은 예감에 걸음이 더 빨라졌다.
미희는 기세좋게 대문을 열어졎혔다.
『할머니이!』
높다랗게 잘 울리는 목소리로 응석을 섞어 부르다 말고 그녀의 두 눈은 화경처럼 크게 벌러졌다.
대청마루에 어머니와 마주앉아 넉살 좋은 얼굴로 웃고 있는 젊은 장교.
그는 아까 낮에 만났던 찰거머리 같은 바로 그가 아닌가.
『하하하. 미희씨 놀라셨습니까? 낮부터 전 여기서 고향집에 돌아온 기분으로 미희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까는 할머니와 재미나게 얘기하고 지금은 어머니랑 이렇게 또 그칠줄 모르는 화제를 즐기는 중이지요』
미희는 노여움으로 얼굴이 샛노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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