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 최형 베드로는 속명을 최치창이라고 하였으며 1813년 공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처음에 충청도 홍주에서 살다가 수원지방으로 해서 1863년경에 서울 석정동(石井洞)에 이사하여 살았는데 그의 부친은 20세때에 천주교로 입교, 영세하였다.
최형의 형은 바로 순교자 최수(崔燧) 요한으로서 그와 같은해 절두산에서 순교했으며 그의 동생은 1836년 3명의 신학생중에 뽑혀서 유학도중에 병사한 최프란치스꼬이다.
최형은 14세때 부모의 권면으로 영세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문을 잘 배워 익혀 집이 넉넉치 못한 이유로 집안을 도와 농사일이나 수공업의 손일을 하였다. 그러다가 1836년 모방나신부가 한국에 입국한 이래 최형은 신부를 도와 성심껏 복사하던 중 그의 재주와 신심이 알려지게 되고 이에 따라 모방신부는 자기가 1839년 순교할 때까지 그를 내내 자기 옆에 있게 하였다. 다음해인 1840년 체포되어 곤장까지 맞았으나 박해가 잠시 지나쳐감에 따라 기회를 타 돈을 좀 집어주고 둘다 풀려날 수 있었다.
그후 최형은 자기 동생과 함께 유학길을 떠났던 김안드레아부제가 귀국하자 그를 도와 배 한 척을 장만하여다시 중국에서 한국 입국을 기다리고 있던 페레올고신부와 다블뤼 안신부를 모셔들이는데 많은 힘을 썼다. 그는 배를 타고 상해에 건너가 한국의 수선탁덕이 된 김안드레아 대건부제의 사제서품식에도 참여하였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김안드레아 신부를 돕다가 김대건신부가 순교하자 또 떠돌아 다니다가 1849년 최양업신부를 맞이하였고 그후 그는 36세쯤되어 결혼하여 서울 남쪽교외로 내려가 종교서적을 번역하고 묵주도 만들어 팔아가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당시 그의 열성과 신앙심은 교우들 사이에 널리잘 알려져 있었던 때라 많은 외교인들이나 신문교우들까지도 그에게 와서 복음을 전해듣곤 하였다. 최베드로는 정식 전교회장은 아니었지만 베르뇌장주교한테 권한을 받아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주고 있었다. 장주교는 오래 생각한 끝에 헌 출판기계 하나를 그에게 맡기며 출판업소의 책임자로 임명 하였다. 최형은 기꺼이 이일을 맡아 여러가지 어려움과 장애물들을 이겨나가면서 4년이나 계속하는 동안 이윽고 수많은 책들과 교회 서적들을 출간하였던 것이다.
그후 장주교가 체포되어 문초를 받고 있을 때에 이선이(李先伊)라는 밀고자가 최베드로는 장주교의 보조자라고하면서 그가 있는 곳을 포도청 관헌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때 최베드로는 먼저 딸과 사위를 보살펴 피신시킨 다음 부인에게 자기의 피신처를 말해 주고서 집을 떠나있었다.
얼마후 포졸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쳐 그 부인에게 대들며 형벌까지 가해봤지만 끝내 아무것도 알아내지를 못하였다. 그런데 최베드로의 집에 사는 14세된 하녀가 밤중에 집을 몰래 빠져 나가는 것을 포졸들이 보고 붙잡아 몰아치고 곤장을 친끝에 최베드로가 숨어 있는 곳을 알아내게 되었다.
이리하여 3월 1일(음 정월15일) 그는 체포되었는데 그의 나이 53세였다. 온 몸에 석회를 뿌리고 주먹으로 마구 친 다음 죄인들을 문초하는 포도청으로 데려갔다. 정월 16일 그의 문초기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있다. 『이선이가 고백한 바에 의하면 서적을 너의 집에 숨겨 두었다 하였다. 책은 어떤것이며 어디에다 나누어주었는가? 또 네가 목판을 새겨 책을 만든 것이 몇해나 되는가?』『저는 8세때 아버지로부터 성교를 배우니 40여년 전의 일입니다. 5, 6년전 장주교는 홍보주와 함께 제 집을 찾은 일이 있었고 그때부터 착수하여 4년전「천주성교공과(天主聖敎功課)」를 처음 발간하니 4권 1질로 되었으며 3천여벌을 박아 내었습니다. 또「성찰기략(省察記略)」은 60여장이 1권으로된 책이나 1천여권 박아 내었습니다. 박아낸 책은 모두 장주교에게보냈으나 장주교가 어디에다 얼마나 나누어 주었는지는 알도리가 없으며 두 책의 목판은 아직 제 집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여기서 베드로는 서슴치 않고 자기 신앙과 활동사실을 자진하여 고백하고 죽어 마땅한 죄를 범한자라고 자기를 고발하는 포도청장에게『나는 하느님 앞에 죄를 범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국법을 어기는 행위를 했다면 그 법에 따라 내 마땅히 재판을 받을 것이오』라고 응수하였다.
실제 최베드로는 경탄할만한 용덕을 발휘, 그의 다리에 뼈가 드러나고 머리털을 잡아매이는 등 더욱 잔인한 고문을 당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는 결국 천주교신앙을 신봉했는다는 죄와 사서(邪書)즉 그리스도교 교리책을 출판했다는 죄, 그리고 다른 교우들을 불지 않았다는 죄등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렇게 1866년 3월 9일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이 선고문에는 최베드로와 그의 형 최요한과 전요한 장운에 관해『이자들은 혹심한 곤장에도 굴하지 않고 쇠나 돌같이 고집들이 세어 사교를 단념하지 않을 것을 맹세까지한 자들이다. 또 이들은 진리를 고백하면서 자기를 사형선고문에 직접 서명까지 하였다. 이에 국법에 따라 이들을 마땅히 사형에 처하노라』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최형은 그의 성실한 벗 聖전요한 장운과 함께 서소문밖 네거리에서 참수되었다. 때는 1866년 3월 9일(음 정월 23일)이며 그의 나이 53세였다. 그의 슬하에는 1남 1녀가 있었다한다. 얼마후 교우들이 와서 상처가 많은 그의 시체를 찾아다가 괫고개라는 곳에 장례를 지냈는대 이들은 이구동성으로『다른 모든 순교자들중에서도 최베드로는 가장 혹심한 고문을 받았다』라고 증언하였다.
<修女ㆍ한국순교복자회ㆍ오륜대 순교자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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