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 정의배 마르꼬는 1794년 서울 창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본래 양반가문의 후손으로서 어려서부터 천성이어질고 진실하였으며 행동함에 신중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정은 유학을 숭상하였던 집안이므로 어려서 부터 사서오경(四書五經)에 대한 공부와 출세를 위해 과거공부에 열중하였다. 과거 공부를 끝낸 그는 서울 어느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는 접장 노릇을 하였다. 그랬으므로 물론 그는 천주교에 대해서는 사교(邪敎)로 단정하였고 경멸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 의형이 가족들 모르게 천주교에 입교하였기 때문에 양반집안 체면과 고민이 대단했다. 그래서 그는 노골적인 언동으로 형을 책망하였고 형이 보고있던 성교서적을 전부 몰수하여 불살라 버렸으며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어떤한 구박과 학대에도 불구하고 그형의 의연한 태도에 놀랐다. 그래서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사학도(邪學徒)들이 어떻게 죽는가를 보기위해 새남터에 가서 3인의 서양선교사들의 순교 광경을 목격하였던 것이다. 이곳에서 선교사들의 순교의 광경에 감명을 받아 그때부터 그는 전에 친하게 사귀던 황안드레아를 찾아가서 자세한 교리와 서적을 얻어보고 참된 진리임을 깨달아 입교하기를 결심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그리하여 정의배는 곧서울로 올라가 영세입교하여 마침내 한국교회의 훌륭한 신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때마침 1845년에 입국한 고페레올 주교는 정의배를 전교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사실 정의배 회장은 자기 회장 임무를 죽는날까지 모든 열성과 온갖 심신을 다해 완수하였는데 이에 대해 다블뤼 안 주교는『정마르꼬는 산성인(聖人)이로다』라고 칭찬하였고 장베르뇌 주교도『나도 장차 이 사람과 같이 천상 아름다운 자리에 있게 됐으면 좋겠다』고 감탄하였다.
실제 정의배 회장은 교우들을 잘 이끌고 예비자들을 잘 준비시키며 병자들을 방문하고 또한 먹을것 조차 없어 고생하면서도 버려진 고아들을 데려다가 도와주는 자선활동에 일생을 바쳤던, 박해시대에 인격이 고매한, 전형적인 교회 회장이었던 것이다. 즉 그는 1845년에 한국에서 최초로 세워진 고아원인 성영회를 통하여 자선사업에 매스뜨르 이 신부와 함께 헌신하였다. 그는 또한 그가 하는 모든일에나 업적에 대해서 다른 이들한테서의 보상을 일체 거절하였다. 그는 그의 두번째로 맞은 아내인 피(皮)까따리나(1898년 3월 12일 순교)와 함께 대단히 검소한 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는데 혹설에는 동정부부 였다고 한다. 이들 슬하에는 자녀가 없어 조카 피(皮)바오로를 양자로 삼았다. 이때 그의 집에는 브르뜨니애르 백 신부가 손님으로 잠시 와 있었는데 피바오르는 백 신부에게 한국 말을 처음으로 가르쳐주기도 했다. 정의배 회장은 변함없이 늘 침착하고 신덕이 깊을 뿐아니라 마음도 대단히 굳세어 모든 사람들 한테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는 자주『순교한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로다. 반면 자기집에 앉아 안일하게 죽는 것은 진정 두려운 일일 수밖에 없도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미사 참례때의 그의 열심은『누구든지 미사참례는 정 마르꼬 회장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브르뜨니애르 백 신부가 확언할 정도로 대단히 열심하였던 것이라.
1866년 병인 박해가 일어나자 정의배회장은 자기 조카를 우선 피신시킨 다음 그는 자기직분에 충실하며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는 어려운 때일수록 자기가 남아있는 그 자체가 교우들에게 절대로 유익함을 잘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866년 2월 25일 한때 장주교를 시중들던 이바오로(선이)가 이때 정의배회장은 웃으면서『그대들이 올줄 알고 있었소. 자 갑시다!』하면서 포졸들을 따라 나섰다. 정회장은 죄수들을 묶는 끈으로 포박되어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마구 천대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나이도 73세나 된 노인이었는데다가 그의 인품마저 포도대장도 존경하지 않을수 없을 정도로 고매하고 위풍이 당당하게 보였던 때문이었다.
그의 우포도청 문초 기록에는 1866년 정월 15일(음)로부터 정월 20일까지로, 그 심문 내용은 저의가 다 선교사들의 거처와 다른 신자들의 거취를 대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그가 굳게 입을 다문 때문에 이런 내용들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자 그들의 문초보고서에는『정의배란 늙은이는 흉측하기는 다른 사람이나 마찬가지여서 그 꼬투리를 잡기가 대단히 힘들다. 이곳저곳 사방에 다니면서 사교(邪敎)를 가르쳤으며 그들이 범한 죄상을 깊이 알고 있음이 분명하며 서양 사람들의 거처도 불지 않았으니 더욱 엄한 벌로 다스려 그들의 진상을 규명할 수 있도록 하여달라』라는 내용이다.
문초때마다 정의배는 곤장을 맞았다. 드디어 그는 장주교 백신부 김신부 서신부와 함께 같은날 군문호수의 선고가 내려졌으나 자백한 사람을 하나라도 더 찾기 위해 같은 날에 처형되지는 않았으며 며칠 더혹독한 고문과 심문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1866년 3월 11일(양)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이 내려 졌다.
첫번째 갈날에 그의 목이 떨어져 순교의 영관을 받았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날이 바로 그의 72회 생일날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세상에 태어난 날과 천상영복 속에 탄생하는 날이 같았던 것이다. 그는 본래 대머리였었기 때문에 그의 수염으로 머리털을 대신하여 목을 매달게 해 3일동안 효수되었고 그후의 그의 시신은 그의 아내가 값을 내고 모셔가서 정중히 장례를 지냈다.
<修女ㆍ한국순교복자회ㆍ오륜대순교자기념관장>
특집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