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안토니오 다블뤼 안주교는 1818년 3월 16일 프랑스「아미앵」(Amiens)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그지방의 행정직을 맡고 공장을 경영했으며 그의 가정은 그당시 프랑스의 전통적인 가정으로서 모든 가족이 모범적인 신앙생활과 덕행의 꽃을 피웠던 집안이었다.
다블뤼 주교의 두형제도 성직자었다.
그의 어릴때 성격은 몹시 친절하였으나 억세고 침착하지 못하여 그의 부모는 그에게 온화한 성격을 갖도록 교육을 잘 시켰다. 그는 1827년 예수회에서 경영하는 쌩아숼 기숙사에 입사하여 그 이듬해인 1828년 첫영성체를 하고 얼마후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 기숙사가 곧 문을 닫게되자 그는 聖리귀에르(St. Riguier)소신학교로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사제직에 뜻을 두고 1834년 10월 물리노(IssyIes-Moulineaux)에 있는 聖슐피스(St. Sulpㆍice)신학교에 입학했다. 그후 1840년 12월에는 부제품을 받고 1년후에 사제로서품되어 주교의 命에 따라 롸이(Roye)본당의 보좌신부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고있던 전교신부로서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자기 소망이 이루어질수 있도록 예수회의 입회를 간청하였다. 하지만 결국에는 1843년 10월 예수회가 아닌 빠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게됨으로써 그는 소망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844년 2월에는 우선 류우꾸(琉球)지방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1844년 9월「마카오」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서는 정치와 종교의 마찰로 제대로 활동을 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때 마침 제3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어 조선으로의 입국을 시도하고 있던 高페례을(Ferr’eol)주교의 권유를 받아들여 조선선교사에 임명될수 있었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이 부모님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제 저는 여러 해 동안 신부없이 불쌍히 지내는 나라 조선의 전교를 맡게 되었으니 큰 행복입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그러한 곳으로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들으시고 혹 슬픈 마음이 드시거든 우리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사람의 털하나도 뽑지 못한 것임을 깊이 생각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이렇게 편지를 보낸 다블뤼는 고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1845년 7월 상해에 도착했고, 같은해 10월 12일에는 서품을 받은지 몇 달안되는 김대건 신부와 함께 세 신부는 충청도 강경(江景) 황산포(黃山浦)에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1866년 3월 순교하기까지 21년동안 그는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되었으며 아울러 조선의 언어와 풍습에도 능통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에 입국한 이름해인 1846년부터 전교활동을 시작한 그는 갖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7백여명의 교우들을 돌보기도 했지만 1846년 김대건신부가 순교하게 되자 일단 활동을 중단하고 습기가 심한 불결한 방에 숨어 살아야만 했기에 안신부의 건강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848년 박해가 뜸해지자 건강에는 아랑곳하지않고 다시 전교활동을 시작하니 1850년에는 생명의 위험까지 있게됐다. 이에 고 주교는 안신부로 하여금 건강이 회복될때까지 전교활동을 금하게하니 안신부는 그동안 신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하고 틈틈이「한한불자전」(漢韓佛字典)을 편찬하는 등 교우들이 손쉽게 볼수있는 신심서 및 교리서를 번역, 저술하기도 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볼 수있는「성교요리문답」「천주교예규」「천당직로」등의 번역서라든가「신명초행」「회죄직지」「영세대의」「성찰기략」등의 저서들은 모두 그의 노력에 의한 것들이었다.
특히 한국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정리는 그의 두드러진 업적들 중의 하나이다.
1853년 2월 3일 고주교가 선종하고 1856년 2월 장주교가 제4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조선에 입국하자마자 안신부를 그의 보좌주교로 임명하면서 안신부는 이 작업을 본격적으로 할수있게 되었다. 조선천주교회사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대한 비망기를 저술하여 모두1862년「빠리」에 보냄으로써 후세의 아주 귀중한 사료가 되었고, 달레(CH.Dallet)신부의「한국천주교회사」저술을 가능케 했다. 또한 1859년을 전후하여 윤지충 등 주요순교자들의 전기를 증언을 통하여 프랑스어로 서술, 빠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냄으로써 조선에 있어서의 순교상황을 똑똑히 알수있게 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읽을 수 있는 한국천주교회의 역사는 안주교의 수고에 의한 것이라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러한 안주교는 1861는 경상도 지방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1865년부터는 내포(內浦)지방에서 전 66년에 들어서서는 박해가 더욱 가혹해져 마침내 같은해 2월 23일 장주교가 잡혀 3월 7일 참수치명하게 되니, 보좌주교인 안주교는 주교직을 계승하여 제5대 조선교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안주교도 3월 11일에는 체포되어 당시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고 있던 민마르띠노신부와 오베드로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 의금부에 갇힌 안주교는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천주교에대한 훌륭한 호교론을 펴기도했다. 그러나 3월 23일 그가 사형에 처해질 것이 결정되어 충청도 보령(保寧) 수영(水營)으로 이송되게 되었는데 그들은 죄수복을 입고 고문으로 상한 다리를 질질끌면서 이송되는 도중 처형 예정날자인 3월 30일 성금요일 보다 처형 예정일이 연기될 기미가 있음을 알고『성금요일 날 죽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의 소원대로 3월 30일인 성금요일날 안주교는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처형이 시작되자 맨먼저 안주교가 칼을 받게 되었다. 이때 회자수(희광이)들이 안주교의 목을 칼로 한번 내려친다음 그대로 버려둔채 처형의 품삯을 흥종하기 위해 한참동안 꾸물거리다가 그 흥정이 결정되자 다시 회자수들이 안주교의 목을 두번째 내리쳤다는 증언이다. 그동안 그의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서 그 참혹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음을 목격자들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이 마지막 시련을 끝까지 넘어서 순교의 화관을 받았다. 그의 시신은 얼마동안 군문효수되었다가 교우들의 손에 의하여 홍산땅에 안장되었다.
<修女ㆍ한국순교복자회ㆍ오륜대순교자 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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