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앵 신부의 원명은 마르띠노 루까 위앵(Martin Luc Huin)으로서 한국성은 민(閔)이었다. 1836년 10월 20일 프랑스의 규용벨 지방에서 태어났는데, 포도밭을 경작하는 그의 부모는 항상 그의 가문에서는 성직자와 수도자가 끊임없이 배출되었음을 자랑하면서 9남매를 모두 훌륭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막내로 태어난 위앵 신부는 그의 본당신부로부터 교육을 잘 받으면서 1851년에는 본당신부의 추천으로 랑그르소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후 1년이 지난 후에는 벌써 신학교에서『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알면서도 신심이 두터운 아주 우수한 신학생』이라는 칭찬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칭찬과 격려 속에서 성직자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부지런히 공부함은 물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꾸려나가면서 1855년 7월 8일에는 착의식을 하게되었다. 즉 수단을 입게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때부터 전교신부로서의 소망을 갖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소망은 곧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참만에야 이루어진긴 했지만.
여하튼 그 이듬해인 1856년 10월에는 랑그르대신 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예기치않게 위앵 신부의 집에 불이나 집안 식구들이 어려운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역경속의 집안식구들은 신학교에 있는 위앵이 공부나 그만 두지 않을까하며 걱정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걱정은 우려에 지나지 않았다. 1861년 6월 29일 그는 사제서품을 받고 랑그르교구 사제가 되었다.
얼마후인 1861년 8월에는 랑그르교구 관할본당인 봐세본당의 보좌신부가 되어 활동하게 됨으로써 그는 본당사목활동에 큰 성과를 거둘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만족할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바로 전교신부가 되기 위한 열망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굳은 확신을 갖게된 위앵 신부는 1862년 11월 4일 주교에게 자신이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편지를 써보냈다. 이 편지를 받은 주교는 거절은 하지 않았지만 교구서품식이 있을 1863년 6월까지 유보한다고 하였다.
마침내 1863년 6월 8일 위앵 신부는 주교의 허락을 받고 그해 8월 20일 빠리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1864년 6월 13일에는 위앵신부는 전교해야 될 지방이 한국이란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기뻐하며 부모님에게는 물론 옛날 본당신부님에게도 편지를 썼다고 한다.
드디어 1864년 7월 15일 위앵신부는 브르트니애르 백신부、볼리외 서신부 도리 김신부와 함께 전교지 한국을 향해 빠리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같은해 가을에는 일단 홍콩에 이르게 되었다. 또 상해를 거쳐 요동까지 바쁘게 왔으나 한국과 쉽게 연락이 되지 않아 그곳에서 한문공부와 한국어 공부를 하며 그해 겨울을 나게 되었다.
그 이듬해인 1865년 5월 27일이 되어서야 위앵 신부를 위시한 일행의 환영을 받으면서 한국에 도착할수 있었다. 도착후 위앵신부는 6월 18일까지 안주교와 함께 내포지방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며 지내다가 그 후에는 내포지방에서 20리쯤 떨어진 당진 합덕지방의 세거리공소로 떠났다.
그곳에서 위앵 신부는 한국풍습에 빨리 적응하고자 노력하였고 실제 초가집에 거처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무릎쓰고 한문공부 및 한국어 공부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헛되지않아 1866년 2월에는 벌써 위앵신부가 교우들의 고백성사를 듣고 신자들을 가르칠수가 있었다. 사실 위앵 신부는 박해직전까지 5백여명에게 고백성사를 주었고、15명 내지 20명에게 병자성사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몇몇 교우들에게 혼배성사도 집전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활동도 순교로써 끝을 맺게 되었다.
박해소식을 접하긴 접했지만 구체적인 지시를 받지 못한 위앵 신부는 행동하기가 곤란하였다.
하지만 안주교의 편지를 받은 위앵신부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1866년 3월 12일 체포되어 안주교 오신부와 함께 3월 19일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수감되었다가 1866년 3월 30일 수영갈매못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되었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내 마음에 아픈 것이 하나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토록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것도 아니요、이곳과 같은 처절한 장소에서 죽게되기때문만도 아니라 이나라 불쌍한 백성들의 구령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못한채 죽게되니 그것만이 마음 아플뿐이요』라고 하면서 기쁘게 하느님께 그의 생명을 봉했던 것이다.
<修女ㆍ한국순교복자외ㆍ오륜대순교자 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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