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1
“…주님, 실종된 단원고등학교 학생 남현철, 박영인, 조은화, 황지현, 허다윤, 단원고등학교 교사 고창석, 양승진, 일반승객 권재근, 이영숙, 그리고 일곱 살배기 권혁규 어린이가 하루 빨리 부모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보살펴 주옵소서. 실종자 가족 여러분, 힘내세요! 실종자 가족 여러분, 사랑합니다! 2014년 8월 17일 Servus Servorum(종들의 종) 프란치스코”
지난해 8월 19일 오후 전남 진도 팽목항에 마련된 천막 성당. 수원교구 총대리 이성효 주교가 세월호 참사 실종자 가족 20여 명 앞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필 서명이 담긴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이날 실종자 가족들에게 전달된 편지는 8월 17일 아침 주한 교황대사관에서 열린 이호진(프란치스코, 세월호 희생자 이승현군 아버지)씨 세례식을 마치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김건태(수원교구 안산대리구장) 신부에게 전달한 것이다.
“내가 손을 잡은 것처럼 실종자 가족들 손을 잡고 내 마음을 전해 주세요.” 김 신부는 교황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 기억2
2014년 8월 16일 오전 광화문 광장. 한국 순교자 124위 시복미사를 위해 이동하던 교황이 탄 차량이 광화문 광장 끄트머리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천막 앞에 멈춰 섰다.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황은 유가족들과 깊은 포옹과 인사를 나눴다. 그의 가슴에는 여전히 노란 리본 배지가 붙어있었다. 교황은 인사가 끝났음에도 400여 명의 유가족들을 한참이나 바라보고서야 다시 차에 올랐다. 시복미사에 참여한 100만 군중들은 물론 이 광경을 지켜본 많은 이들은 다시 한 번 세월호를 가슴에 품었다.
300명 넘는 이들의 숨소리가 일순간 바다 속으로 사라져버린 참사, 세월호 아픔에 한국교회는 어떻게 응답해왔을까. 한국교회는 또 앞으로 어떻게 세월호를 마주해야 할까.
# 그리스도인의 왕직
끊이지 않는 기도, 아픔 나누다
지난 1년은 한국교회가 세월호 참사의 아픔과 동행한 시간이었다. 참사가 발생한 4월 16일부터 참사 1주기를 앞둔 지금까지 세월호 희생자와 함께하고자 하는 한국교회의 몸짓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왕직은 사고 첫날부터 빛을 발했다. 사고가 발생하자마자 팽목항 등지에 천주교 부스를 마련한 광주대교구는 물론 전국 각 교구는 실의에 빠진 유가족들을 위로하며 함께했다.
가장 많은 실종·희생자가 속한 수원교구는 교구 내 모든 본당에서 매 미사 때마다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위한 기도를 바쳤고, 안산 와동일치의모후성당에서는 매일 저녁 참사 희생자와 실종자들을 위해 묵주기도와 미사를 봉헌했다. 또 안산 화랑유원지에 설치된 합동분향소 내에 천주교 부스를 마련, 4월 29일부터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사고가 발생한 진도지역을 관할하는 광주대교구는 4월 19일부터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에 천주교 부스를 마련해 매일 오후 4시, 8시에 미사를 봉헌하며 희생자 가족들을 위로했다. 상장례 지도사들로 구성된 가톨릭상장례봉사자회 회원 10여 명도 팽목항에서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봉사활동을 펼쳤다.
전국 각 교구와 본당 등에서는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메시지와 기도회가 끊이지 않았고,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노란 물결을 이루기도 했다. 참사 피해자들을 위한 물적 지원도 끊이지 않았다. 수원교구를 필두로 모든 교구에서 2차 헌금을 실시하는가 하면 다양한 형식의 모금운동을 벌여 세월호 참사 아픔을 나누는데 힘을 보탰다.
# 그리스도인의 예언직
세상에 진리를 외치다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고비 고비마다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무엇이 복음인지 드러내는 행렬이었다.
세월호 진상 규명 노력이 질곡을 겪을 때마다 교회는 한마음으로 나섰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지난해 6월 7일 각 교구 정평위에 공문을 발송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 촉구 1000만 서명 운동’을 널리 알려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교회 차원의 서명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도보순례가 이어질 때마다 신자들의 관심과 참여도 끊이지 않았다. 지난해 7월 8일 세월호 진상 규명을 촉구하며 경기도 안산 단원고에서 출발한 세월호 참사 유가족 김학일(루도비코)씨와 이호진씨, 이아름씨 곁에는 늘 신자들의 걸음이 뒤따랐다. 순례 초반 10명 남짓하던 동행은 날을 거듭할수록 늘어 적게는 100여 명, 많게는 300여 명이 함께하기도 했다. 주교들도 십자가 도보순례에 동참했다. 8월 6일에는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가 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임원들과 함께 걸었으며, 9일에는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가 함께했다.
참사가 일어난 지 반년이 지났음에도 오히려 논란을 더해가자 교회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리는 일에도 발 벗고 나섰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지난해 10월 17일 ‘세월호는 우리 모두의 십자가입니다’라는 제목의 동영상(http://youtu.be/qvw9iuXJH24) 자료를 내고 전 교구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던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염원하는 천주교 선언’에 대한 이해와 동참을 독려했다.
이런 노력의 힘이었을까, 지난해 9월 말부터 약 3주 동안 진행된 서명 운동에는 전국에서 13만936명이 동참해왔다. 이 서명에는 특히 한국 주교단 29명 중 17명, 전국 각 교구 사제 3995명 중에서 1936명, 남자 수도자 1564명 중에서 615명, 여자 수도자 1만173명 중에서 5304명이 포함됐다.
# 그리스도인의 사제직
304일간 희생자 위한 미사
전국 각 교구는 대부분 참사 1주기인 4월 16일을 전후해 ‘세월호 참사 희생자와 실종자를 위한 추모미사’를 봉헌하면서 다시금 기억의 행렬에 나서는 모습이다.
유가족들과 정부 합의로 세월호 실종자 시신 발굴이 중단되고 천주교 부스가 철수된 직후, 한국천주교 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는 지난 12월 2일부터 2015년 11월 20일까지 총 304일간 이어질 세월호 희생자를 기억하는 미사 봉헌에 나섰다. 주일을 제외하고 304일 동안 이어지는 기간 중 각 수도회 공동체는 매일 한 명씩 정해진 희생자를 기억하며 미사를 봉헌하고, 매주 수요일에는 수도회가 돌아가며 광화문 광장 미사를 집전한다.
이 외에도 교회 내 기관단체와 수도회 등은 상시적으로 세월호 참사 추모와 진상 규명 촉구를 위한 미사와 연대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 그리스도인의 소명
새로운 시작은 기억에서부터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 12,15)
세월호와 함께한 지난 1년, 우는 이들과 기꺼이 함께 울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습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우리나라 역사는 사고가 일어난 4월 16일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는 말들이 무성했다. 그만큼 세월호 참사는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가까워오고 있는 이 시점에도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세월호와 함께 진상도 함께 묻히는 분위기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 신자들은 유가족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자식팔아 한 몫 챙기는 몹쓸 부모’로 매도하며, 정치적 놀음에 이용되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적폐(積弊) 청산’을 통한 ‘국가 대개조’를 부르짖어온 외침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라지고 있다. 이 때문에 자식을 가슴에 묻은 유가족들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올바른 진상 규명을 촉구하며 삭발을 하는 등 응어리진 삶을 이어가고 있다.
올바른 기억만이 참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가 드리는 미사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에 다름 아니다.
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회장 황석모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는 “예언자적 소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불의한 현실에 맞서 고발할 의무가 있다”며 “세월호 사고가 잊히지 않고 끝까지 기억될 때 참된 부활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장)는 “세월호는 침몰했지만, 진실마저도 침몰시켜서는 안 된다. 빛과 어둠의 싸움에서 반드시 빛이 승리한다는 믿음이 우리 교회의 믿음이다”면서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올바른 기억만이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역설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한 시대적 아픔을 슬기롭게 극복해나갈 때 생명이 존중 받는 세상을 향한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라는 목소리도 높다.
황종렬(레오·대구가톨릭대 신학과 겸임 교수) 박사는 “한국교회가 예수의 부활을 준비하고 세상에 알렸던 여인들을 본받아야 한다. 예수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인 여인들처럼 한국교회가 세월호의 아픔을 바라봐야 한다”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한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등에 나서 유족들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노력할 때 우리 시대의 부활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치유가 전제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지난해 9월 안산 단원구에 세월호 유족 치유 공간 ‘이웃’을 열어 활동하고 있는 정혜신 박사(정신과 전문의·마인드프리즘 대표)는 공동체가 함께하는 노력을 강조한다.
정 박사는 “이웃이 모두 치유자로 함께 나서지 않으면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은 결코 치유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그는 ‘이웃 치유자’의 역할에 주목한다.
또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한 ‘야전 병원’ 역할은 지금의 상황에서 치유 인프라를 만드는 일”이라면서 “일시적인 도움보다는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널리 확산돼 공동체 안에서 자생적인 치유의 힘이 작동하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가 우리 시대에 주어진 징표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 징표에서 주님의 뜻을 읽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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