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산으로 가고 있다.’ 앞에 조건문장이 하나 빠져 있긴 하다. ‘사공이 많으면’이라는 전제조건이다. 이 속담을 굳이 풀어 해석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미 우리가 개인적으로 체험했든, 아니면 목격했든 그 경험은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세월호가 산으로 가고 있다. 실제 세월호는 진도 앞바다 몇십 미터 밑으로 9명의 실종자와 함께 가라앉아 있는데, 이 세월호를 둘러싼 우리 정부와 국민들의 인식은 정작 세월호를 향하지 않고 산으로 향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엔 ‘사공이 많아서’라기 보다는 다른 요인들이 세월호의 방향을 교란시키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세월호 안에 앉아 노를 저을 사공은 사라져 버렸다. 노를 저을 배도 없어졌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년이 다 됐지만, 이젠 사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는 냉철한 인식과 국가 재난 사태에 직면한 안전 대책 마련을 위한 뜨거운 열정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신성한 자리를 돈 냄새를 뿌려가며 분열을 획책하는 어둠의 세력이 감히 대신하려고 하고 있음에 안타깝기만 하다.
사건 발생 이후 지금까지 희생자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넘어,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삼보일배를 하고, 노란 리본 가득 매단 십자가를 지고 전국을 돌고, 단식을 하고, 급기야 피눈물 흘리며 삭발까지 이른 그들의 모습에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이 된 아들딸들도 함께 울듯, 비가 오고, 천둥·번개까지 가세했다.
마치 우리 시대의 예수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시몬의 모습을 그들에게서 연상하기 때문이다. 작은 일상에 만족하며 소시민의 삶을 살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졸지에 예언자의 소명을 살아야 했던 구약의 예언자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들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은 우리 시대 시몬이요 예언자이다. 그들이 이젠 자기 부모가 아닌 자식들의 영정사진을 들고 삭발한 머리를 드러낸 채 눈물로 온몸을 적시며 행진까지 나섰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진상 규명 촉구였다.
2014년 4월 16일의 대한민국에서 한 발짝 앞으로 나가기는커녕 쉼 없이 뒷걸음질 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한때는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외환위기를 아주 빨리 벗어나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부러움 반, 두려움 반의 시각으로 우리 국민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채 10년도 되지 않아 그 부러움의 눈동자가 변해 버렸다. 언론자유나 국가 청렴도 등 민주주의 국가라면 마땅히 갖추고 또 성장시켜 나가야 할 가치들이 후퇴를 거듭하는 모습에 비웃음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세월호 참사 그 순간은 나라 전체가 황망함에 빠진 시간이었다. 국가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자문하는 위기의 순간임과 동시에 한편으론 도약을 꿈꿀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동안 우리 사회를 좀먹고 있던 관례와 병폐들이 세월호 참사를 통해 그 민낯을 드러내 보였기 때문이다.
국민의 반 이상이 종교를 갖고 있지만 종교적 가치나 그 가르침보다는 물질 만능의 사고와 집단 이기주의에 빠진 채 이웃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우선순위에서 자꾸 멀어지고 있다. 예수님의 무덤을 막고 있던 돌처럼, ‘나만 아니면 돼’하는 무관심과 외면이라는 커다란 돌들이 우리 삶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진실과 정의는 교실과 사전 속의 단어로 굳어지면서 돌덩이를 넘어 암덩이를 스스로 증식시키는 현장을 살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와 함께 약속의 땅을 향하며 건넜던 ‘홍해 사건’을 기억하고, 오랫동안 광야 생활을 해야만 했던 그 시간들을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인식을 공고히 한 것처럼, 우리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억한다. 매 미사 성제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몸과 피를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그 의미를 기억하고 또 기념한다.
패배와 죽음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실패한 그리스도의 삶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오히려 승리와 생명을 꿈꾸고 있는 우리들이다. 차가운 시신으로 돌무덤에 묻혀 계셨던 주님의 마지막 그 자리에서부터, 돌을 치워 낸 바로 그 현장에서부터 주님 부활의 소식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어둡고 상처 입은 현장을 외면하거나 우회하지 않고 그곳에서부터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치가 이 세상을 새롭게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분단 70년을 살아오면서 우리들 스스로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 속에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공산주의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그 우월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의 그 어떤 가치보다도 소중한 ‘사람 중심’의 생각들은 심지어는 미풍양속으로 생각되어 온 것마저도 점점 더 그 빛이 바래고 있는 현실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많은 수익을 올리면 수완이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가 뒤따르고, 자신을 소개하거나 다른 사람에 대한 첫인상은 어느 동네 무슨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지가 우선적인 관심사가 되어 버렸다. 아무리 정통적인 교회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금전적인 이해타산에 따라 옳고 그름이 정해지고 또 그 당위성과 실천 여부가 뒤따르고 있다. 이웃에 대한 관심은 필요 이상의 오지랖으로 평가절하되었고, 자연스레 진실이니 정의니 하는 걸 제기하는 사람들은 귀찮은 걸림돌로 전락하고 말았다.
때때로 ‘기도를 잘 하고 싶습니다. 기도하는 법 좀 가르쳐 주십시오’ 하는 교우들을 만난다. 기도를 잘 하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이 지향하는바, 곧 사람이나 사건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면서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불의한 현실에 대해 무관심한 채 살아간다면, 제아무리 열심히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한들, 그것은 요즘 흔한 표현 그대로 ‘영혼 없는 기도’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통사고를 당한 이웃을 위해 기도할 경우, 직접 그 이웃을 찾아가서 눈으로 확인해 본 사람과 그저 말로만 기도 부탁을 받은 사람의 기도 내용은 당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왼쪽 팔과 두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는 걸 본 사람의 기도 내용과 그 절절함은 더더욱 구체적이고 또 생생한 바람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5) 성 금요일 독서 말씀 중 일부분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건 당신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다. 그분을 몰라보고, 그분을 체제 전복 세력이라고 몰아붙였던 당시 지도자들의 부추김에 넘어간 우매한 백성들 때문이었다.
주님이신 그분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반복하지 말아야 하겠다. 우리의 무관심이라는 창끝으로 우리 시대의 억울한 이들이 매섭게 찔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당장 내가 겪는 일이 아닌데’하는 이기적인 우리 마음으로 인해 목놓아 울부짖는 우리 이웃이 으스러지는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 이웃들이 겪는 그 아픔과 상처가 결국엔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시간만, 순서만 달리해서 전달되는 우리 시대의 정의와 평화를 향한 의로운 초대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이 냉대와 무관심 속에 묻히지 않도록 하는 우리 신앙인들의 몸부림이다.
주님의 수난은 거치지 않고 마지막 순간에 부활의 영광에만 참여하려고 하는 얄팍한 세상의 가치를 과감하게 헤쳐나가야 한다. 우리가 함께 기억하고 묵상하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야말로 이 세상의 아픔과 상처, 눈물과 절규를 함께하는 우리 신앙인들의 부활의 기쁨을 향한 값진 여정임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부활케 하신 하느님의 영광은 십자가를 지고 온갖 모욕과 수치를 당하시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명하신 당신 아드님을 통해 더욱 크게 드러났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차례이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진리와 정의를 외치는 이웃들과 함께 우리의 살아있는 기도를 바쳐야 한다. 우리의 기도와 투신을 통해 패배와 죽음의 세상이 아니라 승리와 생명의 세상, 기쁨과 영광의 세상이 성큼 다가올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믿고 세상 속에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우리 삶의 부활을 함께 노래할 그 영광의 날을 하느님께서 선물해 주실 것이다.
김인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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