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 때부터 본당 중고등부 교사로 활동하며 궂은 일을 도맡았던 박정원(가명·베드로·29)씨는 대학 졸업 후 연달아 공무원시험에 낙방하면서 본당에 얼굴을 내밀기가 어려워졌다. 최근 용기를 내어 본당 청년 미사에 참례한 박씨는 후배 교사로부터 “나이도 차는데 얼른 안정적인 직장을 얻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듣고 상처를 입었다.
“본당에서 취업준비에 한창인 청년들에게 관심을 갖거나 배려해주지는 않는 듯해요. 그보다는 경제적으로 탄탄한 직장을 얻어 출세해야만 한 가족으로 삼아주겠다는 인식이 팽배합니다. 그러다보니 이들과 담을 쌓게 되면서 신앙생활도 점점 어려워졌어요.”
서울 마포구에 작업실을 둔 서형우(가명·요한·42)씨는 가난이 예술의 원동력이라고 믿으며 살아온 시각 예술가로, 자기 직업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져본 적이 없는 이었다. 독실한 신자인 어머니 덕에 2년 전 늦깎이 신자가 됐지만, 서씨는 본당 공동체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소리 없는 핀잔을 감내해야 했다.
“신앙이란 어느 정도 돈과 시간이 넉넉한 사람만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사목자들은 정책적인 부분에서 재력이 있는 신자들의 말은 듣지만, 직업이 없거나 가난한 신자들의 말은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1980년대에 젊고 고급 교육을 받은 이들이 교회로 밀려들어오면서 교회 내 중산층 출신 신자들의 비율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만큼 잘 살게 된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들은 ‘교회의 발전’이라고 주장한다. “가난한 이들을 향해 교회가 발 벗고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교회 정신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많은 이들이 “교회와 세상이 뭐가 다른지” 통탄하고 있다. 그동안, 부자의 문 밖에서는 웅크리고 있는 가난한 라자로의 수가 늘고 있다.
‘청년이 곧 교회의 미래’라는 슬로건은 실제로 본당 울타리 밖에 있는 청년 신자들을 감싸안기에 역부족이다. 이른바 ‘출세’하지 못한 신자들의 목소리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묻혀버리기 일쑤다.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박동호 신부는 “어느 교구 살림살이를 보더라도 가난한 이를 위한 인력이나 재정을 우선적으로 투입하는 지표는 찾아보기 어렵다”며 “사목활동이나 재정운용에서 가난한 이는 우선순위에서 마지막 자리로 밀려난다. 건축을 비롯해 본당 단체나 봉사자를 위한 프로그램 등에 막대한 예산과 열정을 투입한 다음에 여력이 남으면 가난한 이를 위한 선택을 실천한다”고 지적했다.
부자들에게 눈길이 쏠려 있는 교회에 거리감을 느끼는 가난한 이들은 분명 교회 울타리 안에 있지만, 누구도 부르는 이 없어 멀리서 서성대고 있는 모습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