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처음으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선교 수녀들이 도착한 지 일주일만인 1888년 7월 29일 15~17세의 조선인 처녀 5명이 수녀회에 입회했다. 이들은 수도자에 대한 아무 지식도 없이 오직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며 일생을 바치고자 하는 열의만으로 수도생활을 결심하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선교 수녀들의 입국 이전부터 블랑 주교가 열심한 교우 가정에서 바른 지향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처녀들을 눈여겨보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교회의 격려와 지지 속에서 수녀원을 찾은 첫 지원자들 중 3명은 안타깝게 첫 서원 전에 선종했다. 당시 전염병의 확산과 영양부족으로 인한 결과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해겸 쌘뽈 수녀와 박황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수녀만은 오랜 세월 수도회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남아 수도자로서의 삶을 감사히 봉헌할 수 있었다.
김 수녀는 1963년 4월 14일, 75년간의 수도생활을 마치고 92세로 선종했는데 그는 1931년 연길지방에서 성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들을 지도하러 가 있던 6개월을 제외하고는 일생 본원에서 제의 만드는 일을 했다. 김 수녀가 사용하던 가위는 김 수녀의 수도 여정에 늘 함께했던 재단용 가위다. 항상 몸에도 작은 가위를 지니고 다니며 일거리가 있는 곳 어디에서든 익숙한 손동작에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담았던 그는 평상시 조용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내적 생활을 깊이 해 가며 후배들의 좋은 표양이 됐다.
무남독녀였던 그가 입회할 때 어여쁜 꽃가마를 타고 왔는데, 수도생활을 하면서 때로 집에 가고 싶었지만 집에 가는 길을 몰라 나갈 수 없었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고 한다. 그가 평생 사용한 가위는 이제 세월이 지나 빛이 바랬지만 사는 장소나 하는 일에 얽매이지 않고 단순하게 꾸준히 하느님을 섬겼던 그의 일생은 하느님 안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다.
박 수녀는 1966년 3월 18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통받는 것은 이 세상뿐입니다. 모든 고통을 받아들여 잘 참고,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기도를 바칩시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96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그는 입회한 지 1년 만에 프랑스어를 익혔으므로 선교 수녀들과 수련자들 사이의 통역자로서 수도원 내 의사소통과 교육에 있어 훌륭한 역할을 해냈다. 그리고 몇 년간 제물포 수녀원에 파견됐고 본원에서는 주방일, 프랑스어 통번역 일을 하며 수도회와 동행했다.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집안의 딸로서 강직한 성품을 지닌 그는 어렸을 때 여러 신자들의 순교 행적을 증언한 아버지 박순집 베드로의 등에 업혀 박해자들로부터 피난 다니다가 발을 다쳐 평생 고생했다. 그가 임종 직전까지 사용했던 대나무 지팡이는 올곧게 하느님만을 향해 나아갔던 그의 생애를 대변한다. 다른 좋은 지팡이를 가져다줘도 한사코 거절하며 이 지팡이만을 사용하길 고집했다는 이야기 역시 그가 꼿꼿하게 지켜간 수도 정신을 보여준다.
조선인 첫 수녀들에 이어 많은 수도자들이 양성됐고, 그들은 한국 땅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를 증거했는데 그들이 입었던 수도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라는 신원을 확실히 드러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수녀들은 간소화된 현재의 수도복 대신 ‘고복’(苦服, 고통의 옷)이라 불렸던 수도복을 입고 지금의 베일과는 사뭇 다른 코르넷을 착용했다. 박 수녀와 김 수녀의 사진에서 초창기 수도복을 관찰할 수 있다. 어깨를 감싸는 흰 천의 세 주름은 정결, 가난, 순명의 복음 삼덕을 상징한다. 이러한 의미를 담은 수도복은 착용하기에는 불편해 활동에 많은 제약을 주었지만 봉헌 생활에 수반되는 희생을 아낌없이 바치도록 도왔다.
한편 당시 수도복에는 수녀들이 직접 만든 묵주를 달았다. 첫 서원 때 묵주 한 줄을 달고 종신 서원 때는 약혼반지를 상징하는 둥근 고리에 묵주 한 줄을 더했다. 기숙학교에서는 묵주 두 줄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학생들에게 사감 수녀의 존재를 알렸기 때문에, 수녀들은 시찰 때 묵주를 치마폭에 감싸고 살그머니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아직 종신 서원을 하지 않은 수녀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현재 수녀들의 유품으로 전해지는 서원 묵주를 자세히 보면 묵주에 달린 십자가의 예수님이 매우 닳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눈, 코, 입 그리고 몸 전체의 윤곽이 모두 지워져 있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마음으로 평생 몸에 지니고 매만지며 기도한 흔적이다. 비록 세상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수도자로 생을 마감했어도, 그들이 남긴 낡은 묵주와 십자가는 때론 고통의 눈물과 기쁨의 미소를 나누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했던 삶의 향기를 전해준다.
※문의 02-3706-3255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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