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회, 천주교에서 하느님을 섬기는데 있어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성찬례입니다.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성찬례를 거행하는 미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드리는 공적인 예배인 성찬례는 ‘교회 생활의 정점’이기도 합니다.
제1독서인 탈출기에서 시나이 산에서 맺은 계약을 이야기합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습니다. 이 계약의 내용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법을 주고 백성들은 그 법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계약을 맺은 것을 확정하기 위해 백성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치고 그 제물의 피를 제단과 백성에게 뿌립니다. 그리고 모세는 말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
우리에겐 낯선 풍경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계약은 피를 통해 맺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고대에 계약을 맺을 때, 두 사람은 동물을 반으로 갈라놓고 그 사이를 지나가는 것을 통해 계약을 맺었음을 확인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이런 풍습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통해 경신(敬神) 공동체가 됩니다. 그들에게 제사는 하느님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예식이었고, 계약을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구약성경의 예식을 통해 새로운 계약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교의 대사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마치 대사제가 속죄의 날에 일 년에 한 번 성소에 들어가 백성의 죄를 씻는 제사를 봉헌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말합니다. 대사제가 드렸던 제사처럼 예수님은 자신을 제물로 바쳐 우리에게 영원한 속죄를, 죄에서의 해방을 선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재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구약의 대사제와 같은 모습이고 또 그 제물 역시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분은 제사의 집전자이면서 동시에 제사의 제물이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에게 선사한 선물을 구약의 제사와 계약을 통해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책임은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을 따르고 지키는 것입니다.
동일한 방식으로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만찬 때에,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음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모세가 하느님과 맺었던 것이 옛계약이라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믿는 이들과 맺은 계약은 새계약입니다. 그리고 이 계약은 더 이상 동물을 바치는 제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옛계약 안에서 바치던 동물을 바치는 제사는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다른 제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완전하고 결정적인 희생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에 우리가 들은 말씀은 모두 ‘계약’에 관한 것입니다. 계약이라는 말 자체가 조금은 딱딱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안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말씀과 가르침을 따르고 지켜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계약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냥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꼭 해야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을 통해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그 죽음이 보여주는 사랑을 기억합니다. 이제 그 사랑을 따르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부분입니다. 우리의 계약, 새로운 계약은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을 통해 맺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허규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1999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독일 뮌헨 대학(Ludwig-Maximilians-University Munich) 성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성서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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