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 나로두(민중 속으로) 운동은 1880년대 러시아에서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이 민중을 계몽하기 위한 일환으로 시도한 것이다. 한 사내가 의사가 되어 러시아의 궁벽한 시골로 투신했다. 바이니쯔끼 집안의 사람들은 신분의 벽을 넘어 새로운 진보적 사상을 만들어내고자 유산을 포기하고 딸을 교회지기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고 그들 부부를 위해 학비와 생활비를 부치려 이십오 년 동안이나 농사에 헌신한다. 물론 은퇴한 교수 사위가 새 아내와 돌아왔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헛수고였음을 깨닫는다.
그 당시 공연되었던 안톤 빠블로비치 체홉의 희곡 ‘바냐 아저씨’와 관련하여 내게 흥미로운 것은 당대의 불안했을 정치적 상황에서 이 작품이 어떤 울림을 가지고 관객들과 만났을까 하는 것이다. 러시아의 작가들이 언제나 검열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써야만 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더구나 이 작품이 탈고된 시기의 러시아는 아스트로프의 말처럼 ‘관 속에서 눈을 감았을 때 어떤 환상이 찾아와 주지나 않을까’ 하는 희망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암울한 사회였다. ‘이반’이라는 러시아의 아주 일반적이고 흔한 이름이(바냐는 이반의 애칭이다) 상징하듯 당시의 지식인들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느끼고 있을 정치현실에 대한 고뇌와 무기력감을 이 작품은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작품은 안톤 체홉의 다른 희곡들과 마찬가지로, 교수의 새 아내 옐레나를 향한 바냐와 아스트로프의 사랑, 또 아스트로프를 짝사랑하는 쏘냐, 이런 의붓딸의 마음을 알면서도 의사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옐레나 등이 만들어내는 우스꽝스런 상황들로 채워진다. 결국 3막에서 쏘냐는 옐레나에게 의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도움을 청한다. 바냐는 친구인 아스트로프가 옐레나와 키스하는 장면으로 충격을 받고, 농장을 팔자는 교수 세레브랴꼬프의 이기적인 제안에 분노가 폭발해 총질까지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쏘냐는 옐레나를 통해 자신의 마음이 의사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알고 깊은 상처를 받는다. 4막에서 도망치듯 교수 부부가 떠나고, 의사는 바냐와 쏘냐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과를 못해 미적거리다가 떠나는 것으로 드라마는 끝이 난다.
바 냐 (쏘냐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면서) 쏘냐, 나는 괴롭단다. 내 이 괴로움을 알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쏘 냐 하지만 하는 수 없어요. 살아 나가야 하니까요!…
드라마는 끝났지만 관객들은 마지막 위로와 같은 쏘냐의 독백을 대하게 된다. 그것은 암울한 현실에 대한 진보적 희망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체홉은 러시아의 민중들이 어떻게 하느님 앞에서 살아나갈 힘을 얻는지 이 독백을 통해 보여준다. 쏘냐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바냐 삼촌을 위로하면서, 고통스런 삶을 인내하고 난 뒤 마주하게 될 하느님의 영광에 대해 굳게 믿고 있음을 역설한다. 죽은 뒤에 만나는 신의 영광이라고? 도대체 낙관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이 대사에 우리는 눈물을 울컥 쏟게 하는 위로를 받는다. 사랑하는 의사 앞에서도 자신이 못생겼음을 자각해야 하는 이 어린 소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음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 가엾은 삼촌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다. 이 마지막 독백에 라흐마니노프가 곡을 붙인 ‘우린 쉬게 될 거예요’(мы отдохнем!)는 유튜브에서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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