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말 프랑스 혁명기 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혁명정부는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사제와 수도자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또한 따르지 않을 시 강압적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다.
마리아의 딸 수도회를 설립한 윌리엄 요셉 샤미나드 신부는 이런 상황 속에서 교황청으로부터 ‘사도적 선교사’라는 칭호를 얻고 사람들의 신앙 회복을 위해 활동했다.
샤미나드 신부는 비밀리에 사제직을 수행하다가 1797년 추방 명령을 받고 스페인으로 가서 3년간의 망명 생활을 기도로 보냈다.
그리고 1800년 보르도에서 프랑스의 재그리스도교화와 복음화를 위한 목적으로 마리아에게 봉헌된 평신도들의 단체인 ‘원죄 없으신 마리아 신심회’를 시작했다.
마리아의 딸 수도회의 공동 설립자인 아델 드 바츠 드 트랑꿸레옹 수녀는 혼란을 겪고 있는 고국을 보며 특별한 부르심과 소명을 느꼈다. 아델은견진성사를 받은 친구와 함께 당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많은 젊은이들의 선종을 위해, 또 하느님을 잊고 가치적 혼란을 겪고 있는 젊은이들을 위해 ‘작은 회’라는 신심 단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회원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장하는 한편 지역 주민들이 믿음을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1808년 ‘작은 회’의 책임자 아델을 찾아온 샤미나드 신부는 작은 회와 보르도의 마리아 신심회 사이의 닮은 점을 보고 아델과 그 회원들에게 신심회에 합류하기를 제안했다.
1816년 두 창립자는 아장에 ‘티없으신 마리아의 딸 수녀회’를 창립했고, 이듬해 샤미나드 신부는 보르도에 남자 ‘마리아회’를 창설했다.
마리아의 딸 수도회는 이런 평신도 신심단체가 배경이 돼서 탄생했다.
두 설립자의 영성을 사는 마리아의 딸 수녀들은 무료 학교를 열어 가난한 이와 젊은이들에게 읽기, 쓰기, 재봉, 요리, 교리 등을 가르쳤다. 특히 피정 지도를 통해 그리스도교적인 생활에 대한 열성을 되살리고자 했다.
마리아의 딸 수도회는 2006년 12월 당시 교구 안산대리구 철산본당 주임 김진태 신부의 요청을 받아, 2007년 1월 19일 본당과 본당 내 어린이집(마리아 어린이집)에 수녀들을 파견함으로써 교구에 진출했다.
본당에 파견된 수녀회 수녀들은 본당 사목 방향과 지침에 따라 협력하며 본당 공동체 활성화에 이바지하는 한편, 갓 신앙의 싹을 틔운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에 힘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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