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스티노신학교 100주년 기념관은 입구에서부터 실물 크기의 사진으로 드망즈 주교와 마주하게 된다. 드망즈홀도 따로 있다. 그처럼 드망즈 주교의 신학생 사랑은 각별했다. 드망즈 주교는 교구청, 신학교, 성당, 성모당, 수녀원, 묘지 등을 한 곳에 모았다. 지금도 신학교가 교구청 구역에 있는 교구는 드물다. 그는 그렇게 신학생과 함께 생활했다. 그가 신학교를 처음 세울 때 “내 이름과 대구교구와 미래의 한국인 사제들의 이름으로 감사드립니다”라며 도움을 청했다. 그는 “장티푸스를 앓고 있는 상급 라틴어반 이 안드레아가 많은 피를 토했다”라는 등 신학생의 상황을 일일이 관찰했다. 연합소신학교 운영 이후에는 서울에 갈 때마다 대구교구 소속 소신학생들을 각별히 챙겼다.
신학생들은 매년 주님 공현 대축일에는 주교관에 가서 왕을 뽑고 연극을 했다. 그들은 주교를 모시고 대축일을 지냈고, 주교가 여행에서 돌아올 때에는 대구역으로 마중 나갔다. 이 부자 같은 사랑은 ‘안(安) 주교의 유복자’란 말도 만들었다. 1937년 7명의 신학생이 차부제품을 받았는데, 이듬해 주교가 선종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1938년 6월 11일 라리보 주교에 의해 서품됐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드망즈 주교의 주교성성일과 같은 날이었다. 이중 서정길, 최재선, 장병화 3인이 훗날 주교가 됐다.
주교는 신학교에서 시험, 성적심사와 발표 등도 직접 주관했다. 신학교에 입학하면 신학생들은 남다른 각오로 임해야 했다. 그들은 미사전례, 성무일도는 물론 일상생활을 라틴어로 해야 했고, 수업도 라틴어로 했다. 프랑스어도 라틴어로 배웠다. 한국말을 하다 들키면 그대로 성적에 반영돼 감점 처리됐다. 라틴어 사용은 주일, 대축일, 소풍날만 관면됐다. 기념관에 남아 있는 라틴어사전과 교재들이 그들의 수고를 보게 한다.
신학교의 학사일정은 프랑스와 같았다. 그래서 신학교 초기에는 학기가 9월에 시작해 이듬해 6월에 끝나고, 성탄휴가만 2주일 정도 있었다. 그러다가 추운 날씨를 피해 차츰 겨울방학이 길어져 일반학교와 같게 됐다. 매주 목요일과 주일에 시험이 있었는데, 목요일에는 오전에 시험을 치르고 오후에는 신학교 별장으로 산책 나갔다. 시험결과는 다음달 첫 목요일에 발표했다. 학기말에는 종합시험, 성적발표와 시상식이 있었다.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주는 점수는 0~5로 나뉘는데, 각 등급의 ½도 있어서 11등급이다. 3점 이하면 학교를 떠나야 했다. 일상생활에서도 통상 라틴어반, 철학반, 신학반으로 나누어 각반에서 학생들 간에 모범생 투표를 했다. 교수들이 최다득표자를 시상했다. 겹겹이 쌓여 전시되고 있는 성적표에 기록된 빼곡한 점수와 교수들 메모가 당시 엄격했던 성적관리를 드러낸다.
성유스티노신학교의 초대 교장인 샤르즈뵈프 신부는 드망즈 주교의 선배였다. 그는 용산신학교 교장, 파리외방전교회 신학대학 교수를 지냈다. 드망즈 주교는 신학교를 세우기 전부터 그를 교장으로 초빙했다. 샤르즈뵈프 신부는 그의 풍부한 교육경험을 바탕으로 교재를 편찬해 사용했는데, 당시 성유스티노신학교 교육의 질은 주목받았다. 페네, 타계, 리샤르, 최민순 신부 등의 역대교장과 줄리앙, 김승연 신부 등 10여 명의 교수신부, 윤창두 등 3명의 평신도 교사가 교육에 힘썼다. 이들 교수들이 사용하던 교재도 전시돼 있다. 책 사이사이에 꽂혀있는 인쇄보다 더 정갈하게 쓰인 준비용 메모가 그들의 정돈된 생활을 짐작게 한다. 신학교가 효성여대와 통합되면서 하양캠퍼스 박물관으로 갔다가 성유스티노신학교 100주년 기념관 개관에 맞춰 돌아온 책들이다.
드망즈 주교는 시대변화에 적응했다. 그는 1922년부터 예비과, 1936년부터는 연합소신학교(동성상업학교 을조)를 운영키로 했는데, 이는 일반과목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또 드망즈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로 선임돼 로마로 갈 때, 유학생 두 명을 직접 데리고 가서 입학시켰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두 학생에게 라틴어를 할 수 있느냐고 묻고는 훌륭한 사제가 되라고 당부했다. 주교의 근대화 노력은 음악에도 미쳤다. 성유스티노신학교에는 한 때 브라스 밴드가 있었다. 1920년 경부터 명도회에서 사용하던 악기를 가지고 밴드가 조직됐다. 밴드는 매주 토요일 성모당으로 기도하러 갈 때 음악을 연주했다. 그러나 연습시간,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악대의 활동은 지속되지 못했다. 1930년 이후 성유스티노신학교의 악기는 서울 연합소신학교로 넘겨졌다가 1943년 대구로 돌아왔다. 그러나 지금 기념관에는 성유스티노신학교에서 사용하던 1940년 경 프랑스에서 제작한 오르간만이 남아 있다.
기념관에는 드망즈 주교가 성체를 강복할 때 사용한 성광이 있다. 신학교에서는 매주일 저녁 성체강복이 있었다. 당시에는 성체거동도 성대하게 시행됐다. 그리고 주교의 망토, 지팡이, 주교관 등이 그의 수고와 기쁨을 전하고 있다. 그 망토는 해질 무렵이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성모송을 바치며 걷는 현재의 신학생들을 보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의 053-660-5100 대구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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