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교회는 치유자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사목해왔다.
다만 초기 교회는 병원이라 할 수 있는 시설 설립에 기여해 왔지만 과학적인 관찰과 실험에 의거한 임상 의술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학 발전 및 육성에 큰 기여를 하지는 못했다.
초기 교회의 병원들은 환자만을 위해 설립된 것이 아니라, 순례자를 위한 숙소나 종교적인 장소로서 병원, 고아원, 숙박소의 기능을 하는 곳이었다. 자선 사업가들은 가난한 순례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시설을 제공해 주며 도움을 베풀었고, 앓는 사람의 조력자가 되는 일에 관심을 쏟았다.
이후 교회는 나병 환자, 장애인, 노인, 극빈 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설립했다. 젊은 의사들을 양성하는 병원으로서의 개념 역시 교회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로마제국이 멸망해 사회가 극심한 혼란에 빠져있을 때는 수도자들이 지역 사회를 대신해 고아와 노인, 환자에 대한 봉사를 수행했다. 11세기까지만 해도 많은 지역 교회와 수도회들은 소속 병원을 갖는 일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십자군 전쟁 기간 전후로 설립된 군 병원은 병원 발달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군 병원들은 의학 지식과 기술, 간호와 관리 절차의 개척지가 됐으며, 순례자의 보호를 위해 설립된 조직체들은 환자와 고통 당하는 이들을 보살피는 단체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구호기사단 혹은 병원기사단으로 불리는 성 요한의 예루살렘과 로도스와 몰타의 주권 군사 병원 기사단의 활약이 널리 알려졌다.
흑사병의 창궐로 유럽 전역에 죽음이 짙게 드리워졌을 때도 교회는 묵묵히 의료봉사를 통해 아픈 이들과 함께 했다.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공포로 가득 찬 도시에서 병자들을 돌보다 함께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또한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유대인들에게 적개심을 표하고, 폭력과 광기에 물든 이들에게 회개를 호소하는 것도 교회의 역할이었다.
19세기에 이르러 치료와 의학 연구 분야가 급속히 발달하고 정밀해짐에 따라 교회 지원의 병원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에 교회는 더 가난한 이들을 찾아 오지로 떠났다. 의료 봉사가 절실한 이들을 찾아가 도움을 주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의료사목은 박해시대부터 시작한다. 신앙선조들 중에는 중인 계층인 의원들이 적지 않았고, 이들은 약국을 교우들이 모이기에 적절한 장소라 여기고 활용했다.
종교의 자유를 얻은 이후 천주교회는 시약소와 진료소를 설치해 형편이 어려운 사람과 고아들을 구제 치료했다.
교회는 개항 이후 1930년까지 모두 7개의 간이진료소(서울·제물포·의주·영유·비현·덕원·원산)를 설치 운영했다.
한국천주교회는 재정난 특히 인재난으로 대규모 의료 활동을 전개하지 못했다. 그러나 소규모일지라도 꾸준히 봉사함으로써 이 분야에서 천주교인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주민들에게도 공헌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다양하게 전개되는 교회의 활발한 치유 활동은 의료 사업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온전하게 해주고 구원해 주는 하느님의 사랑과 그 나라에 대한 선포이자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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