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라고 불린 수녀가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데 그치지 않고 그 자신이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수녀, 프란치스코 성인 이래 가난의 참된 의미를 가장 훌륭하게 살았던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 그는, 그 가난으로 인해 가장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마더(Mother) 데레사’의 이야기다.
데레사 수녀는 1910년 8월 27일 마케도니아 공화국 스코페에서 한 건축업자의 세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아그네스 곤히아 브약스히야.
1928년 그는 아일랜드의 로레토수도회에 들어가 이듬해 캘커타 세인트 메리 고등학교로 가서 20여 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며 후에 교장까지 지냈다.
이 기간 동안 데레사 수녀는 캘커타의 빈민촌에서 봉사하며 살고 싶다는 뜻을 원장 수녀에게 간청했고, 그 청원은 로마로 전달돼 허락을 받았다.
20년 동안 봉직하고 있던 학교를 떠나면서 “부유한 이들의 아이들을 가르치기보다 가난한 사람, 외롭게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 나의 소명이라 생각한다”는 말을 남겼다.
1948년 캘커타의 빈민촌으로 들어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기 시작한 그에게 그가 가르쳤던 제자들이 찾아왔다. 12명의 제자는 데레사 수녀와 함께 일했고 후에 ‘사랑의 선교 수녀회’로 인가받게 된다. 이들은 임종의 집, 빈민 학교, 병원, 진료소, 나환자 수용소 등을 운영했다.
데레사 수녀는 삶 전체를 통해 가난에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처럼 그냥 죽어가게 해 달라며 병원에서의 치료를 거부하기도 했다.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캘커타를 방문한 뒤 흰색 리무진을 선물했으나 즉시 팔아 치워 서벵골의 나환자 수용소 건립에 사용했고, 1979년 노벨평화상 상금 19만 달러도 모두 나환자 수용소 건설 자금으로 내놓았다. 1981년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당시 데레사 수녀는 너덜너덜한 수도복에 작은 성경과 묵주, 그리고 잿빛 헝겊 가방만 손에 들고 있었다.
2002년 12월 10일 교황청은 마더 데레사와 관련된 기적을 인정하면서 세상을 떠난 지 불과 5년 3개월 만에 그를 복자로 선포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2003년 10월 19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복했다.
1981년 6월 30일 한국에 진출한 사랑의 선교 수녀회는 양로원 ‘평화의 집’을 마련해 사도직 활동을 시작했다. 1983년 4월 거처를 수원교구로 옮겼고, 현재까지 양로원에서 어르신들을 돌보거나 임종 직전의 무의탁 행려 환자들과 극빈 가정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복녀 데레사 수녀의 뜻을 따라 살고 있는 사랑의 선교 수녀회는 진공청소기, 세탁기 등 전자제품을 쓰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주신 건강한 손과 발로 봉사를 실천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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