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마다 기념품·현수막 가득
“전쟁·개인주의로 세계 분열 신자 앞장서 통합정신 발휘를”
■ 볼리비아
망치·낫 모양 십자고상 받아
교도소 찾아 재소자들 격려
“이윤만을 좇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
■ 파라과이
시민대표들 만남 자리에 동성애 단체 대표 참석
들썩이는 에콰도르
7월 6일 에콰도르의 항구도시 과야킬에 8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운집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첫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서다. 미사가 거행될 사마네스 공원에는 하루 전부터 수만 명 신자들이 교황 얼굴을 보기 위해 텐트나 널빤지, 침낭 속에서 밤을 지새웠다. 미국·아르헨티나·멕시코·브라질·칠레·푸에르토리코 등 각국 깃발들이 넘실거렸고, 거리마다 교황의 사진으로 만든 기념품과 현수막이 가득했다. 에콰도르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로 들썩거렸다.
교황은 이날 강론에서 “가정은 하느님 용서와 자비를 만나는 작은 교회이며 최대의 사회적 자산이므로 어떠한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다음날 에콰도르 수도 키토에서 두 번째 미사를 집전한 교황은 통합의 정신을 강조하고 전쟁·폭력·개인주의로 분열된 세계 안에서 신자들이 분발할 것을 촉구했다.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을 비롯해 100만 명 안팎의 인파가 모인 이날 미사의 제2독서는 에콰도르 원주민 토착어인 케추아어로 선포되기도 했다.
교황은 환경보호 중요성도 강조했다. 에콰도르 방문을 마치고 떠나는 자리에서 환경운동가들을 만나 “에콰도르가 단기이익을 좇지 않길 바란다”며 “천연자원 관리자로서 우리는 사회 전체뿐 아니라 후세대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했다.
▲ 7월 7일 에콰도르 키토에서의 미사 중 분향하고 있는 교황. 【CNS】
지인들을 잊지 않는 교황
교황은 첫 번째 미사 후 지역사회에서 ‘파키토 신부’로 잘 알려진 프란치스코 코르테스 신부를 만나 오찬을 함께했다. 교황은 추기경 시절 코르테스 신부가 있던 하비에르 신학교에 예수회 신학생들을 보내 수학시킨 바 있다.
브라질 상공에서 날아온 육성 메시지
교황은 에콰도르를 떠나 볼리비아로 가던 중 브라질 상공을 지나면서 호세프 대통령과 브라질 국민 앞으로 “브라질 국민이 사회적·정신적 가치를 발전시키고 정의와 연대, 평화를 위한 약속을 지키기 바란다”는 육성 메시지를 보냈다. 교황의 메시지를 포착한 건 브라질 공군 항공통제소에 근무하는 카롤리니 산투스 부사관으로, “전혀 상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너무 감격스럽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교황 위해 코카잎을
7월 8일 교황은 휴대용 산소탱크 없이 해발 4000m에 달하는 볼리비아 행정수도 라파스 부근 엘알토 국제공항에 내렸다. 교황이 10대 시절 병으로 한쪽 폐를 거의 제거했기 때문에, 경호원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휴대용 산소탱크를 준비하고 있던 터였다.
라파스는 세계에서 해발이 가장 높고 산소가 희박한 수도로 분류된다. 이 때문에 안데스 원주민들은 혈액의 산소 흡수를 돕는 성분이 함유된 코카잎을 씹거나 우려 마시며 고산증을 예방해 왔다. 현지 원주민들로부터 ‘성스러운 잎’으로 불리는 코카잎은 고산병 증세를 완화시켜주지만, 마약인 코카인의 주원료라 향정신성 식물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볼리비아 방문에 앞서 교황은 코카잎을 씹어보고 싶다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져 관심을 모았으나, 이날 실제로 코카잎을 씹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대신 교황은 볼리비아행 기내에서 코카잎과 카모마일, 아니스씨가 혼합된 트리마테 차를 마셨다.
▲ 7월 8일 볼리비아 엘알토 국제공항에 도착한 교황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전통의상을 입은 어린이들 환영을 받으며 걸어나오고 있다. 【CNS】
이념 대결 아니라 대화 위한 선물
교황은 8일 볼리비아 도착 환영행사에서 모랄레스 대통령으로부터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망치와 낫 모양으로 만든 십자고상, 볼리비아-칠레 간 국경분쟁에 관한 서적 「바다의 책」을 선물 받았다. 십자고상은 노동자 권익을 옹호하다 1980년 군부에 의해 살해된 예수회 루이스 에스피날 신부가 디자인한 것이었다. 예수회 출신인 교황은 공항을 떠나 차량으로 이동 중 에스피날 신부의 시신이 발견된 차칼타야에 잠깐 멈춰 애도하기도 했다.
교황은 국경분쟁에 대해 언급하면서 “양국 간 벽을 높이기보다는 다리를 세워야 한다”며 대화를 통한 외교적 해결을 요청했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교황을 ‘친구’로 부르며 “누구든지 가난한 사람을 배반하면 그리스도를 배반한 사람이며, 프란치스코 교황을 배반하는 사람”이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모랄레스 대통령이 교황에게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십자고상을 선물한 것은 이념적 도발이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 교황청 대변인 페데리코 롬바르디 신부는 9일 “열린 대화를 뜻하는 것이었지 특정 이념에 관한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식민시대 원주민에 중죄” 사과
교황은 9일 오후 볼리비아 현지 원주민·운동가들과 만난 자리에서 “가톨릭교회가 원주민들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고 밝혀 청중들로부터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교황은 “이른바 ‘아메리카 정복시대’에 교회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원주민들에게 중대한 죄를 저질렀다”며 “수많은 죄가 있었음에도, 원주민들을 지키려던 사람들 덕분에 충만한 은총도 있었다”고 말했다. 원주민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인 아돌포 체우로베스는 “기대 이상의 사과였다”며 교황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교황은 이날 기업이나 대부업체, 자유무역 조약과 긴축정책 등의 영향으로 평화와 정의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식민주의의 새로운 형태를 예견하면서 이윤만을 좇는 자본주의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제의실이 된 버거킹?
바쁠 땐 격식도 내던져 버렸다. 교황은 당초 9일 산타 크루스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할 예정이었으나 포프모빌(교황 의전차량)을 타고 오는 동안 군중들에게 화답하느라 30여 분 가량 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마침 인근에 있던 패스트푸드점(버거킹)이 제의실 후보군으로 떠올랐고, 교황은 그곳에서 제의를 갈아입었다. 광장에 모인 수백만 명을 더 지체하게 놔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악명 높은 교도소 찾아 인권 강조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장 시절부터 성 목요일에 교도소나 병원 등 소외된 이들을 찾아 나섰던 교황. 그는 10일 볼리비아 산타 크루스 외곽에 위치한 악명 높은 팔마솔라교도소를 찾아 재소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재소자들의 인권유린 실상을 전해들은 교황은 교도관들에게 “재소자들의 존엄을 회복시키되 모욕을 주지 말고, 용기를 북돋워주되 고난을 짊어지게 하지는 말라”고 당부했다. 아울러 재소자들에게는 “우리에게는 형제애를 나눌 능력이 있다”며 “남을 돕는 데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격려했다.
팔마솔라교도소는 중남미 지역의 열악한 교도소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으로, 살인과 마약 등 온갖 불법이 횡행하는 ‘치외법권’ 지대로 알려져 있다.
“위대한 파라과이 여인들이여”
교황은 7월 11일 파라과이의 카쿠페 성지에서 집전한 미사에서 “파라과이의 여성들은 미주대륙의 가장 영예로운 존재”라며 칭송했다. 파라과이는 1860년대 중반 인접국인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 3개국 동맹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남성의 90%가 목숨을 잃고 나라 전체가 멸망할 위기를 겪은 바 있다. 교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파라과이 여성들은 이 땅이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도록 했다”고 덧붙였다.
▲ 7월 11일 파라과이 아순시온 카쿠페 성지 외곽에서 교황 주례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신자들이 나무 위에 올라가 있다. 【CNS】
동성 인권단체 초청
동성결합에 반대입장을 고수해온 교황청의 입장에 변화가 생겼을까.
11일 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에서 열린 교황과 시민사회단체 대표들과의 만남에 현지 동성애 인권단체 소모스게이(SOMOSGAY·우리는 게이다’라는 뜻의 스페인어) 대표 시몬 카살이 참석했다. 교황이 카살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눴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파라과이 주교회의 결정으로 이번 행사에 공식 초청된 것은 이례적이다. 소모스게이 측은 “이번 초청이 동성애 인권을 향한 가톨릭교회의 중대한 태도 변화”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