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위치한 국제인도법연구회 사무실에서 만난 최은범 박사.
국제인도법연구회 대표이자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고문인 최은범(토마스 아퀴나스·81·의정부교구 대화동본당) 박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둔전리에서 태어난 최 박사는 지난 1948년 11월 부모 곁을 떠나 형님을 따라 38선을 넘어 남한에 둥지를 튼 실향민 1.5세대다.
실향민 1세대들이 세상을 떠나는 오늘날. 그는 더 늦기 전 관계자들과 이산가족 70년사를 정리해내기로 결심했다.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위원장 이상철)가 최근 펴낸 이산가족 백서 「이산가족 70년」이 그 결과물. 최 박사는 이 백서를 처음부터 기획하고 편집위원장까지 도맡았다. 뼈아픈 이산(離散)의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여든을 넘긴 고령이지만 신앙으로 다져진 끈기도 한몫했다. 그는 “하느님께서 허락한 건강을 밑천 삼아 ‘내 인생의 마지막 봉사’를 한다는 심정으로 편집위원장의 책임을 맡았다”고 고백했다.
그의 월남 당시 사연을 듣기 위해선 전제해야 할 배경지식이 많았다. 본론으로 들어가 기억을 더듬거릴 때, 그는 더 이상 흔들리는 눈빛을 감출 수 없었다.
토지개혁에 재산 뺏기고 쫓겨나
명태와 정어리가 지천으로 잡힌다는 함경북도 명천군 앞바다. 그는 약 1만5000평에 달하는 농토를 보유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지난 1946년 봄에 토지개혁이 실시되자 그의 가족은 집과 농토는 물론 소와 쟁기까지 빼앗기고 고향에서 쫓겨났다. 친구들과 달려가 바닷가에 풍덩 빠지며 놀던 아름다운 추억을 고스란히 빼앗긴 채 함경북도 남단 동해안에 위치한 성진시로 밀려난 것이다.
공산당이 점령한 뒤 도시 이름마저 김책시로 바뀐 성진시에서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자, 지난 1947년 형님 내외가 서울로 떠났다. 이듬해 11월 서울서 낳은 돌 지난 딸을 업고 형수 최백록씨가 나타났다. 형수는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진 ‘다이아찡’이라는 알약을 비롯해 칫솔·치약·설탕 등 미제 물건들을 한아름 들고 왔다. 동네 사람들은 한달음에 형수가 서울에서 가지고 온 미제 물건들을 사갔다. 다음 날부터 형수는 남쪽에서 잘 팔린다는 마른 오징어와 북어, 명천 무수단 앞바다에서 잘 잡히는 곤포(다시마) 말린 것을 사들여 다시 서울 내려갈 채비를 했다.
그해 한탄강은 차가웠다
그의 아버지 최종락씨는 형수에게 짧게 당부했다.
“이번에 데리고 갈 네 시동생 은범이와 시누이 채숙이를 잘 부탁한다.”
곁에서 눈물을 훔치던 그의 어머니 김정옥씨도 가보로 남은 재봉틀 한 대를 내주며 말했다.
“네가 이번에 내려가면 늙은 우리들은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 없으니 이거라도 가지고 가거라. 이건 내가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일제 싱거(SINGER) 재봉틀이란다. 공산당이 집과 농토를 모조리 빼앗아 갔어도 이것만은 눈감아 줬단다.”
그해 11월 초. 형수는 머리에 싱거 재봉틀을 이고, 등에는 돌 지난 딸을 들쳐 업었다. 최 박사는 형수가 남쪽에 내려가 팔 북어와 오징어를 등에 지고 손에는 갈아입을 내복과 비상식량을 챙겨 들고 따라 나섰다. 여동생도 함께였다. 찬바람이 부는 성진역에서 기차를 잡아탔다.
당시만 해도 경원선 열차를 타고 남한으로 버젓이 내려올 수 있었다. 모두가 38선을 넘어 남쪽에 내려가 장사를 하고, 북쪽에 필요한 생필품을 사들고 올라오던 때였다. 큰 짐을 지고 움직이는 데 특별히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기차가 원산역에 닿았을 때 형수를 안내하던 중년 남자가 말했다.
“이 기차 종착역은 연천이오. 그곳엔 보안대원들이 많으니 우린 한 정거장 앞에 있는 대광리에서 내릴거요.”
안내인 말을 따라 형수 일행은 대광리에 내려 서쪽 문산으로 가다가 방향을 틀어 한탄강 쪽으로 향했다. 그날 한탄강가에는 하얀 서리가 내렸다. 형수는 속바지만 입은 채 강을 건넜다. 최 박사도 형수를 따라 강에 뛰어 들었다.
한탄강은 차가웠다. 뼈까지 시려왔다. 간간히 강가의 북한 초소에서 초병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행은 더욱 속도를 냈다.
형수는 싱거 재봉틀 위에 돌 지난 딸을 올려놓고 헉헉대며 강을 건넜다. 강 건너 고갯마루턱을 넘자 마침내 안내자가 외쳤다.
“됐수다! 여기가 바로 남조선입네다!”
어머니는 북쪽 하늘 보며 눈물만
지난 1948년 말 겨울 그의 어머니도 성진발 경원선을 타고 아들이 살고 있는 서울로 내려왔다. 오붓하게 형수가 끓여주는 동태찌개를 앞에 두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
겨울 내내 최 박사의 어머니는 북쪽 하늘만 바라보고 울고 한숨지었다. 북에 두고 온 아버지를 걱정한다고 짐작한 형수 내외는 어머니로부터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일제강점기 때 부모를 잃고 고아로 우리집에 찾아와 내 품에서 자란 그 녀석이 눈에 아른거려 견딜 수가 없구나. 겨울방학 때 할미를 찾아 성진에 오면 그 아이가 얼마나 실망하겠니. 내가 없으면 어쩌겠니!”
그해 겨울이 끝나기도 전, 최 박사가 자고 있을 때 어머니는 새벽에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가고 말았다. 그게 영원한 이별이 될 줄 몰랐다. 어머니가 그 고아 외손녀를 만났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세례와 혼인
그는 남한에서 정규교육을 마쳤다. 서울 한성중·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법학과와 동대학원 법학과를 나왔다. 그 후 경희대 대학원 박사과정에 편입해 지난 1986년 8월 동대학원에서 ‘국제인도법의 발전과 전시민간인 보호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유난히 종교와 문학에 호기심이 많던 그는 학부 시절 당시 채플 강의를 매우 좋아했다. 종교학점은 12학점만 취득해도 됐지만 18학점까지 따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자가 되려는 마음은 없었다.
아내를 만난 건 지난 1963년이었다. 아내 이무자(제르트루다·75)씨는 독실한 구교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유난히 자신을 신뢰했던 장모의 영향으로 신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자이자 교회사 연구의 상징적 존재인 고(故) 최석우 몬시뇰(1922~2009)로부터 7개월간 교리를 배웠다. 어찌나 질문이 많았던지 어느 날 최 몬시뇰이 그를 불러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가. 당신은 누구시오”라고 묻기도.
지난 1965년 세례를 받았다. 법학이론을 공부하면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매력을 느껴 세례명을 짓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해 10월 23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고(故) 박도식 신부(가톨릭신문사 13대 사장) 주례로 혼인미사를 봉헌했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혼인미사 당시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는 최 박사. 그에게는 명동성당에서 혼인미사를 치렀다는 게 아직도 최고의 영광이다.
▲ 지난 1965년 10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고(故) 박도식 신부(가톨릭신문사 13대 사장) 주례로 혼인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모습. 올해로 혼인 50주년을 맞는 최 박사, 사진에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최은범 박사 제공)
(최은범 박사 제공)
다시, 오늘
혼인 50주년을 맞은 그는 “분단·광복 70주년이기도 한 올해는 이산가족 70년의 해”라고 고통스럽게 표현했다. 광복을 맞은 그때부터 우리 민족에게 이산(離散)의 고통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는 늘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위치한 국제인도법연구회 사무실에 출근한다. 이내 북쪽 창문을 바라보며 그리움에 젖는다. 창세기 45장에 등장하는 요셉과 형제들의 재회 장면이 자신에게도 일어나길 바랐다. 이력이 화려했기에 물질적 조건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지만, 혈육의 이별에 대한 고통은 언제나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아버지가 지키려고 했던 땅을 되찾을 마음은 없다. 태어나고 자랐던 집과 터를 간절히 찾고 싶을 뿐. 가능하다면 고향에서 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도 내비쳤다. 분명 그의 소망은 세속적인 이익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그는 이산가족의 문제를 신체적 고통의 차원이 아닌 영혼의 문제로 보고 있다. 대북지원과 관련해 교회가 시혜적 차원의 지원에 그치지 않고, 이산가족의 영혼을 위해서도 나서주길 바랐다.
그는 다시 북쪽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침묵이 하염 없이 흘렀다.
◆ 최은범(토마스 아퀴나스) 박사는
1934년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둔전리 출생.
1948년 11월 부모 곁을 떠나 형수를 따라 월남.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법학과와 동대학원 법학과를 나옴.
1959년 3월 대한적십자사 공보부에 입사.
1963년 1월 31일 국제적십자 창시자인 장 앙리 뒤낭의 저서 「솔페리노의 회고」를 번역·출간. 이 책은 적십자사의 모든 임직원들과 봉사대원, 청소년적십자(RCY) 단원들의 필독서였고, 일반 독자에게도 널리 읽혔다.
1971~1973년 남북적십자회담 초기에 대한적십자사 대표단 전략팀으로 예비회담(판문점)·본회담(서울, 평양) 등 30여 차례 회담 준비에 직접 참여.
1985년 정부의 국민포상 수상.
1986년 8월 경희대 대학원에서 ‘국제인도법의 발전과 전시민간인 보호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법학박사 학위 취득. 국내에서 국제인도법 연구의 개화기를 연 계기가 됨.
1994년 대한적십자사 정년퇴직.
2002년 7월 대북지원 물자(비료) 전달 대표단장 역임.
2010년 대한적십자사 인도장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