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신부와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의 사제서품 성당과 한국교회 최초의 외국인 신부인 주문모 신부의 성장지를 포함하고 있는 중국 상하이교구는 중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교구다. 상하이에 천주교를 전파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은 서광계(徐光啓, 1562~1633)로 상하이교구 역사는 그로부터 시작된다.
북경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그는 별세한 부친의 시신을 고향 상하이로 운구하던 중 남경에서 예수회 선교사 라자로 카타네오(Lazarus Cattaneo)를 알게 되면서 처음 천주교를 접하게 됐다.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서광계는 카타네오 선교사에게 상하이에서 전교해줄 것을 요청했다. 1608년부터 2년도 되지 않았을 때 서광계와 그 일가의 도움으로 세례를 받은 신자가 200명이 넘었을 정도로 서광계는 상하이교회 발전의 초석이었다. 18세기에는 상하이 일대의 교우가 1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상하이는 중국교회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300여 년간 상하이 지역 교회는 줄곧 외국 선교회의 관리를 받게 되는데 처음에는 포르투갈이 관리하는 남경(南京)교구에 소속돼 있다가 프랑스 파리 예수회에서 관할하는 대리구에 예속되는 변화를 겪었다. 이후 1946년 상하이교구가 설립됐다.
신중국 성립 후 상하이교구는 교회의 토착화를 모색하는 등 새로운 시기에 들어서게 되지만 중국이 공산화되는 과정에서 10년간 일체의 종교활동을 금지 당하고 만다. 공산정권이 수립된 1949년 당시 상하이교구에는 280여 개의 성당이 있었지만 종교활동이 금지된 10년간 대부분의 성당이 방치되거나 파괴되고 창고나 공공시설로 개조되는 수난을 겪었다.
1978년 상하이시 인민정부가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책을 시행한 후 20여 년에 걸쳐 상하이교구는 재건되고 교회활동도 활기를 띠고 있다. 상하이교구에는 중국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산 성모성지가 있어 매년 5월 성모성월이면 중국 전역에서 몰려든 수만 명의 신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또한 1982년 서산성지에 설립된 서산신학교는 30년간 사제를 배출했다.
현재 상하이교구에는 개방된 성당과 공소가 130여 개로 5개 대리구에 분포한다. 교구 사제는 90여 명이다. 개방된 모든 성당에서는 미사를 봉헌하지만 사제 수에 비해 성당이 더 많다 보니 일부 성당에서는 매주 미사를 봉헌하지는 못한다. 평상시에는 본당에서 사목 실습 중인 신학생, 수도자와 신자들이 본당 사제의 지도를 받아 성당에서 봉사한다.
상하이교구는 수도자의 활동이 활발한 곳이다. 1985년 성모헌당회(聖母獻堂會)라고 명명된 교구 수녀원을 설립해 현재까지 80여 명의 서원수녀를 배출했다. 서원을 한 수녀는 성직자와 더불어 교구 안의 중요 직무와 사목활동을 담당하고 있다.
상하이교구 신자 수는 14만 명으로 추산된다. 주교좌성당은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가 사제품 받은 장소로 확실시 되는 서가회성당이다. 교구청도 서가회성당과 같은 구역 내에 자리한다. 서가회는 ‘서씨 집안이 모여 사는 거리’라는 뜻으로 상하이교구의 초석이 된 서광계의 후손들은 지금도 서가회에 남아 있으며 서광계의 묘도 서가회성당 바로 인근에 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