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을 마지막으로 보수한 이는 건축왕 헤로데였다. 기원전 20년 그는 모리야 산을 평평하게 깎아 오백 미터 길이의 광장을 만들고, 그 위로 성전 개축을 시작했다. 무너진 성전을 통감하게 하는 통곡의 벽을 보노라면, 예루살렘을 우러러 한탄하신 예수님의 눈물이 떠오른다(마태 23,37-39). 강도들의 소굴로 타락한 성전이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지리라 예고하셨듯이, 서기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는 열혈당원들의 반란을 진압하며 성전을 파괴했다. 이 사건은 유다인들에게, 우리가 명성 황후 시해나 불탄 숭례문에서 느끼는 아픔에 버금가는 고통을 주었다. 이제 성전은 유적도 거의 없고, 모리야 산을 사각으로 감싼 바깥벽들만 남았다. 그 가운데 서쪽 벽이 바로 통곡의 벽이다. 솔로몬이 첫 성전을 봉헌하며 ‘이곳에서 바치는 백성의 기도를 들어주십사’ 청했기에(1열왕 8,30), 유다인들은 지금도 성전과 가까운 서쪽 벽으로 모인다. 다른 쪽에도 벽이 있지만, 옛 지성소가 바라보던 방향인 서쪽을 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통곡의 벽은 유다인들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해 주는 심장 같은 곳이다. 벽 길이는 오백 미터에 달하나, 우리가 사진에서 보는 통곡의 벽은 전체의 1/8 정도에 해당한다.
통곡의 벽 이름은, 유다인들이 로마에 거슬러 일으킨 2차 반란에서 유래했다. 서기 66년 발발한 열혈당원들의 1차 반란 뒤, 132년에는 바르 코흐바 혁명이 이어졌다. 두 번에 걸친 반란에 분노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유다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내쫓았고, 나중에야 그들은 아브월 9일(성전파괴일)에만 예루살렘 출입 허가를 받는다. 그날 유다인들이 이 벽을 붙들고 통곡하다가, 울면서 떠났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전승에 따르면, 성전이 무너지던 날 벽이 이슬에 젖어 우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통곡의 벽이라고도 전한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방문해 간절한 기도문을 벽에 꽂는다. 요한 바오로 2세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문도 눈길을 끌었다. 다만, 오십 년 전만 해도 통곡의 벽은 유다인들에게 그야말로 화중지병, 곧 그림의 떡과 같았다. 통곡의 벽을 포함한 동예루살렘이 요르단 영토라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1967년 일어난 6일 전쟁 뒤에야,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통합에 성공한다.
통곡의 벽은 역사도 흥미롭지만, 전통 유다인들의 종교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장소다. 유다교는 남녀가 유별하므로, 회당이 남자 층, 여자 층으로 구분되어 있듯이 통곡의 벽에서도 따로 기도해야 한다. 가부장적 전통에 따라, 남자 구역이 몇 배 넓다. 토라 두루마리를 보관하는 지성소나 독실한 유다인들이 사용하는 도서관도 남자 구역 안에 파인 동굴에 있다(게다가 동굴 내부에는 밖에서 볼 수 없는 서쪽 벽 일부가 계속 이어진다). 성당에서는 남자들이 모자를 벗지만, 유다교는 반대다. 이방인도 통곡의 벽에서는 ‘키파’라는 정수리 모자를 써야 한다. 여인들은 민소매 등의 짧은 옷을 입을 수 없다.
통곡의 벽에서 사람 구경을 하다 보면, 앞뒤로 몸을 흔들며 기도하는 유다인들도 포착된다. 졸면 안 되니까 흔드느냐는 질문도 나오고, ‘흔들어 바치면 두 배’이기 때문이라고 재미있게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온몸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몸을 흔들며 모세오경을 읽는 모습은 꽤 신실해 보인다. 차 안에서 책을 읽어도 어지러운데, 온몸으로 토라를 봉독하는 모습은 나름의 신앙을 오라처럼 발산한다. 기도 뒤에는 지성소에 계실 하느님께 등을 보이지 않도록 뒷걸음을 친다. 조심스럽게 물러나오는 유다인들을 볼 때마다, 2000년 전 통곡의 벽 위에서 위엄을 떨쳤을 웅장한 성전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 통곡의 벽으로 향하는 성인식 행렬. 앞에 선 어린이가 주인공이다.
▲ 남자 구역 동굴 내부에서 종교서적을 읽는 유다인. 그 옆으로 지성소가 보인다.
▲ 통곡의 벽(남자 구역)에서 키파를 쓰고, 신명 6,8의 율법대로 이마에는 성구갑, 팔에는 끈을 묶은 유다인들.
김명숙(소피아)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