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 가고 싶어 하는 산티아고 순례 길을 다녀온 추억이 있다.
정상 코스는 800㎞를 완주해야 했지만 시간이 없는 관계로 중간에 찔러 들어가 340㎞만 걸었다. 소처럼 묵묵히 걸은 대가로 생 발톱 하나가 빠져 버렸다. 일행 중에 몸이 아파 버스타고 건너뛰는 사람, 짐을 부치고 가볍게 걷는 사람 등 다양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인생살이의 고달픈 삶도 이와 비슷하겠다 싶었다. 나는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걸으면서 순례자의 도장을 하나하나 받아가며 빈칸을 채워가고 있었다. 이것은 ‘나는 엉터리로 걸어오지 않았다’라는 징표를 보여 주는 성실함의 증명서였다.
발로 걸을 땐 100㎞, 자전거로 순례할 때는 200㎞ 이상을 순례해야 한다. 이런 머나먼 길을 우리 팀장은 일 년에 네 번 온다고 하였다. 그분의 능력은 한국에서도 빛났다. 자신은 서울 천호동에 살고 있고, 아버님은 수원 정자동에 살고 계시는데 아버님을 뵈러 갈 때마다 걸어간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우리 일행은 어이가 없어 말문을 닫았다. 성당이 코앞인데 자동차를 이용하는 게으름의 비만 신자들이 눈에 스쳐 지나갔다. 아무튼 목적지에 이르러 순례증을 받으러 긴 줄을 섰다. 짧게 왔건 길게 왔건 공평하게 순례증이 주어진다.
누구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800여㎞를 달려온 이들과 짧은 길을 들어온 이들에게 어찌 같은 순례증이 나오는지…. 억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성당에서 느끼는 맛은 달랐다. 사람만한 커다란 향로가 수십 미터를 오갈 때 무언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이 솟아올랐다. 이 맛은 짧은 코스를 거친 분들은 체험할 수 없을 것이다. 힘든 만큼 종착역에서의 기쁨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마태오 복음 20장을 읽다보면 이와 비슷한 장면을 묵상할 수 있다. 포도밭의 일꾼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누구는 오전 9시에, 누구는 오후 12시, 3시, 5시에 계약을 맺고 똑같이 품삯을 받는 과정의 말씀이다. 분명히 누군가가 불만을 품었다. 어떻게 먼저 일한 사람과 맨 나중에 일한 사람의 품삯이 같을 수 있을까?
어떤 학생이 나에게 물었다. “신부님, 유아세례 받고 평생 착하게 산 사람하고, 제멋대로 살다가 나중에 입교하여 세례 받은 사람하고 어떻게 대우가 다르냐?”는 것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엉망진창으로 살다가 막판 뒤집기 하여 신앙생활한 사람에게는 뭔가 차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민스러운 질문을 던지고 싶은 사람은 산티아고에 한 번 다녀올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긴 코스를 순례한 사람과 짧은 코스를 순례한 사람은 종착역에서 느낀 감정이 같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많은 체험을 한 분일수록 많은 은총의 체험을 나눌 수 있었으니 손해 볼 것이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초대는 순례자 증명서 그 이상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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