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구원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상징이다. 페르시아인들이 최초로 사형도구로 사용한 이래 로마인들이 사용했던 가장 잔악한 사형 도구인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희망의 상징이며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게 됐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는 도구인 가톨릭의 십자가는 개신교의 십자가와는 다르게 고통 당하시는 예수님께서 매달려 계시며 오상이 있다. 그래서 십자고상(十字苦像)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고통과 죽음은 인간을 위한 희생이며, 부활로 넘어가는 징검다리임을 가톨릭의 십자고상은 강하게 표현한다.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에는 박해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십자고상’들이 소장돼 있다. 성낙전(안드레아)씨 외에 여러 신자들이 기증한 것이다. 그중 몇몇 ‘십자고상’은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십자고상과는 조금 다르게 예수님의 발 밑에 해골이 새겨져 있다. ‘십자가’와 ‘해골’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탈리아의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1431~1506)의 대표작인 ‘성 제노 제단화’의 메인 그림 아래쪽에는 세 개의 그림이 있다. 그 중앙에 있는 ‘골고타의 언덕’은 예수님과 두 강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의 배경은 바위로 둘러싸인 골고타 언덕이다. 골고타는 우리말로 ‘해골’이라는 뜻이다. 그림 왼쪽 하단에 해골 무더기가 이곳이 해골산임을 나타내고 바닥에 난 구멍들은 사형 집행지임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놓인 해골은 그곳이 바로 아담의 무덤이 있던 자리이며,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지진이 일어나 아담의 해골이 밖으로 나왔다는 전승에 따른 것이라 한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로마 5,17) 첫 번째 아담은 범죄로써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지만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첫 아담의 무덤 위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세상에 생명을 가져오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표현이 십자고상의 해골이다. 오래된 십자고상은 생명을 주시는 십자가의 신비로 우리를 이끈다.
“주여, 저를 어찌하시려 하나이까. 저에게 짊어주신 짐을 완전히 이루도록 힘을 주시옵고, 끝까지 보살펴주시옵소서.” (고 김선영 신부 편지 중에서)
본 전시관에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기 자신을 버리고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순교의 삶을 살았던 약현본당 출신 김선영 요셉 신부(1898~1974)의 약력과 유품이 전시돼 있다.
1898년 8월 15일 경기도 광주의 순교자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김선영 신부는 10세 때인 1908년 용산 소신학교에 입학해 대신학교 교육을 거쳐 1923년 25세 젊은 나이로 서울교구 사제로 서품됐다. 서품 후 바로 예수 성심 신학교 교수로 임명돼 5년간 신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쳤다. 1928년 황해도 장연본당에 부임해 1930년 여름까지 보좌신부로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 4월 한국천주교회 최초 해외 선교사제로 중국에 파견돼 만주지역 일대에서 한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인에게도 전교를 했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외국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추방되자 김선영 신부는 ‘대리 주교’가 되기도 했다.
1951년부터 중국에서는 공산당 정부 주도의 애국교회가 세워졌다. 김선영 신부는 애국교회 가입을 완강히 거부해 1951년 10월 9일에 체포, 투옥됐다. 그는 공산당의 회유와 협박을 이겨내고 15년간 형무소 생활 후, 1966년 러시아 국경 근처 인룽허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8년간 강제 노역과 병으로 고생하다 75세인 1974년 2월 14일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치고, 수용소 인근 산에 죄수들과 함께 묻혔다.
김선영 신부는 44년의 긴 세월을 만주 땅에서 어린 양들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친 목자였다. 그중에서도 23년 동안 옥중 생활의 참혹함은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김선영 신부가 감옥과 강제 수용소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는 그의 유품들을 보면 느낄 수 있다. 김선영 신부에 관한 소식을 한국교회가 처음 알게 된 것은 중국 장춘에서 함께 생활했고 그 당시 하얼빈시 조선인 병원 간호원으로 근무 중이던 최경숙 수녀가 한국에 살던 동생과 연락이 닿으면서부터다. 성심 대신학교 제자였던 오기선 신부가 김선영 신부의 유해를 한국에 모셔오기를 최 수녀를 통해 간곡히 청했고, 기적적으로 묘를 발견해 1987년 3월 21일 파묘하게 됐다.
드디어 김선영 신부의 유해는 1987년 5월 6일 57년 만에 그리운 고국 땅에 돌아왔다. 같은 해 5월 1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장례미사 후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됐다. 이후 근·현대 순교자 명단에 올라 2013년 4월 26일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됐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맡겨진 양 떼를 끝까지 돌보려던 김선영 신부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시복의 영광으로 재현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해 본다.
※문의 02-312-5220, 02-362-1891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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