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사면 권한을 언급한 2015년 9월 1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서한은 두 가지 사실을 환기시켰다. 낙태한 여인들 대다수가 교회의 도움을 기대하지 못하고 숨어서 괴로워한다는 것, 그리고 낙태를 직·간접으로 조장함으로써 여인들을 중죄로 몰아넣은 자들의 책임을 묻는 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 부조리한 현실은 사회 풍조와 대중의 의식을 상당 부분 반영하는 TV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드라마 중에서 낙태의 참혹함을 비유적으로, 그러나 생생하게 표현한 대표작은 ‘M’(1994)이다. 청초한 여인과 흉측한 악마를 오가는 배우 심은하의 연기, 편집의 힘을 빌린 초록색 눈동자와 섬뜩한 목소리로 기억되는 작품이다. 혼외 임신을 이유로 낙태된 태아의 영혼이 젊은 여인의 육신을 빌려 세상에 복수하고, 그 참극을 끝내기 위해 공권력이 태아의 영혼이 깃든 여인을 사살한다는 내용이다. 에필로그에는 “우리는 이미 생명이 시작되는 생명체를 아무런 가책 없이 살육하고 있다”는 대사가 삽입됐다. 이듬해에는 밴드 N.EX.T가 ‘Requiem for the Embryo’(태아를 위한 진혼곡)라는 연주곡을 발표해 경종을 울렸다. 낙태의 참혹함에만 치중한 감은 있으나, 생명 살해라는 행위의 본질을 환기시킨 그 시절 대중문화의 업적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방송에서 낙태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어졌지만, 생명에 대한 거부는 우회적이고 교묘한 방식으로 확산되고 있다. 예컨대 드라마에는 못된 시어머니들이 악당을 사주해서 며느리를 유산시키는 설정이 등장한다. 케이블과 종편 채널에서는 피임약 복용을 현명한 선택으로 미화하는 광고를 내보내면서 미혼 임신부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공익 추구를 표방하는 공중파 채널의 탐사보도물도 이 혐의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궁금한 이야기 Y’와 같은 프로그램은 뉴스에 보도된 아동학대와 영아살해 사건을 다루면서 모자이크와 음성변조를 방패 삼아 사건의 경과를 소상히 전달한다. 일면 시청자의 정의감에 호소하는 것 같지만, 거듭되는 사건들의 사회적 배경을 다루지 않는 단순 묘사는 사건을 일부 성격이상자들의 특이사례나 오싹한 괴담 정도로 치부하게 만들 수 있다. 혼외관계로 태어난 아이가 비극의 불씨가 되는 이야기는 종편에 유행하는 ‘실제상황’ 등의 재연 드라마에서도 단골 소재다.
그 결과는 어떤가. 인터넷 뉴스 게시판의 댓글에서 보듯이, 오늘의 대중 사이에는 “낳아서 고생시키느니 낙태하는 것이 낫다”는 이상한 믿음이 만연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어린 생명의 희생을 막는 근본 대책은 부모됨에 대한 교육, 약자에 대한 보호, 생명에 대한 책임이다. 비극의 뿌리는 내버려둔 채 더 어린 생명을 제거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발상은 20년 전 드라마가 고발하던 당대의 비양심과 다를 것이 없다. 생명을 경시하는 방송과 매체에 비치는 것은, 중죄가 되는 낙태에 대한 분명한 협력(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272항)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중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매체의 영향력을 핑계 삼아 낙태 권하는 세상의 죄에 동참하는 사람들, 어쩌면 우리의 추한 얼굴이다.
김은영(TV칼럼니스트)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경향잡지 기자를 거쳐 미디어부에서 언론홍보를 담당한다. 2008년 <매거진T> 비평 공모전에 당선된 뒤 <무비위크>, <10아시아> 등에 TV 비평을 썼고, 2011년에 단행본 <예능은 힘이 세다>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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