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락을 따라 굽이굽이 경사로를 올라간다. 가을 산을 찾는 등산객들 어깨너머로 산을 찾는 모든 이를 맞아들이는 듯 팔을 뻗고 있는 예수상이 보인다. 수리산성지(전담 박정배 신부)다.
예수상을 지나 수리산성지 순례자성당 입구를 향하니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의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가지런한 자세에 겸손하게 모은 두 손과 하늘을 바라보는 두 눈,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을 향해 올곧았던 성인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성당을 들어가서도 성인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두 손을 모은 성인을 따라 기도하고 순례를 시작했다.
‘수리산 최경환 성지 담배촌’
성당 입구에 이곳이 성지임을 알려주는 비석이 서 있었다. 수리산성지는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모여 살던 교우촌이었다. 1832년경 최경환 성인이 가족과 함께 수리산에 정착해 살기 시작했고, 교우촌이 형성됐다. 농사하기에 척박한 환경 속에서 신자들은 담배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어갔다. 그래서 담배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실 신자들이 처음 세운 공소는 지금의 순례자성당보다 조금 더 아래쪽에 있었다. 1998년 외곽순환도로가 세워지면서 공소가 철거됐고, 2000년 새 성당을 건축하면서 전담사제가 파견돼 순례자를 위한 미사가 봉헌되기 시작했다.
순례자성당에서 조금 더 올라가니 ‘최경환 성인 고택 성당’이 보였다. 최경환의 가족이 이 자리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고택 성당은 터만 남아있던 이곳에 성인과 그 가족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작은 성당이다.
성당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윽한 나무냄새가 가득하다. 고택이라는 이름처럼 시골집에 들어온 것만 같다. 제대를 중심으로 길게 뻗은 일반적인 성당과 달리 제대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앉아 기도할 수 있게 돼있었다. 아마도 교우촌 신자들이 이렇게 모여 기도하지 않았을까.
제대 앞에 마리아상, 요셉과 아기예수상이 보였다. 요셉이 마리아와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했듯이 최경환 성인은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이곳에 왔다. 오직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이유 하나만으로 이 척박한 땅에 온 성인은 가족들의 신앙을 이끌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 이성례(마리아)도 순교해 복녀가 됐고, 아들 최양업은 우리나라 2번째 사제가 돼 신자들을 이끌었다.
제대 맞은편에는 절벽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심지어 성당 내부에 드러나 있기도 했다. 절벽의 바위를 보면서 바위처럼 굳건했던 성인의 모습을 그렸다. 성인은 1836년 장남인 최양업을 신학생으로 보내고 회장으로서 수리산의 교우들을 돌보다 1839년 기해박해에 체포됐다. 40일 이상 갖은 형벌을 받아낸 그는 결국 옥사로 순교했다. 형리들은 한결같이 굳건한 그를 보고 “바위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 절벽이 언제부터 이 자리에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성인이 살던 때에도 여기 있었다면 지금 우리의 기도 소리가 절벽에 맞닿은 성당에 울리듯, 성인의 기도 소리도 이 절벽에 울리지 않았을까.
성당을 나와 최경환 성인의 묘를 향했다. 묘역을 향한 길은 두 갈래로 갈려 왼편에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돼 있었다. 주님 수난에서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길을 입체적으로 묘사한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오르면 최경환 성인의 묘를 만날 수 있다.
묘까지 오르는 길은 경사도 만만치 않았지만 포장되지 않은 돌길이었다. 성인의 묘에 다다르니 어느새 땀이 송글 맺혔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성인의 말을 곱씹게 된다.
“형제들, 용기를 내시오. 주의 천사가 금자(金尺)를 가지고 당신들의 걸음을 재고 있는 것을 보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을 서서 갈바리아로 나아가시는 것을 보시오.”
성인이 신자들과 함께 체포돼 이송되는 고된 길 중에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한 말이다. 그가 순교로 나아간 길은 다름 아닌 십자가의 길이었다.
성인의 묘 앞에는 야외제대가 설치돼 있다. 수리산성지는 이곳에서 오는 19일 오전 10시 순교자현양대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성지는 주일과 화~토요일 오전 11시 순례자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또한 매월 첫째 주 목요일 오후 9시에는 성시간과 미사를, 매월 둘째 주 월요일 오후 9시부터는 찬송, 묵주기도, 미사를 바치고 있다.
※문의 031-449-2842 수리산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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