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극 ‘아! 복자 이성례 마리아’
“천주학을 버려라, 살려주마!”
“무슨 소리들입니까. 살아계시는 천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천주님을 버리겠다니요. 배교란 말 토하지 말고 죽음을 택합시다. 육신의 죽음일 뿐입니다.”
부산교구 울산대리구 꽃바위본당(주임 천경훈 신부)이 연극무대로 변했다. 작년 시복된 이성례 마리아(1800~1840)를 다룬 순교극 ‘아! 복자 이성례 마리아’가 9월 13일 오전 11시 교중미사 중 성전에서 열려 신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전문 연극인들이 아닌 본당 신자들이 출연, 더욱 신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성례 복자는 한국교회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모친. 극심한 박해에도 오직 하느님에게 모든 걸 바쳤던 복자의 삶이 배우들 열연으로 생생히 펼쳐졌다.
갖은 문초에 생을 마감하는 교우를 끌어안고 절규하는 복자 모습에서 신자들은 손수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특히 둘째 아들 최의정 야고보가 어머니의 사형집행에 앞서 희광이(사형집행인)를 찾아가 ‘단칼에 목을 쳐 고통을 덜어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에서는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 어머니, 양업이 형! 천주님, 우리 어머니 영생복락 누리게 해주세요.”
방어진본당에서 순교극을 관람하기 위해 찾았다는 한 신자는 “전문배우도 아닌 일반 신자들인데 연기를 너무 잘해 감동이 더 크게 전해졌다”고 말했다.
신자들 자발적 노력으로 준비
이번 순교극은 기획에서부터 시나리오, 연출, 연기 등 모든 준비가 본당 신자들의 자발적 노력으로 이뤄졌다. 발단은 올해 초 김맹환(살레시오·61) 본당 총회장이 본당 신자 연극인 김묘임(로사리아·69)씨에게 제안하면서부터다. “부산교구 ‘문화복음화의 해’이자 124위 시복 1주년인 올해를 뜻 깊게 보낼 수 있도록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순교극을 준비하면 좋겠다”는 김 회장 의견에 김씨가 기다렸다는 듯 화답해 왔고, 천경훈 신부가 이에 공감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7월부터 두 달 동안 매일 평균 3시간씩 연습이 진행됐다. 배우를 맡은 이들은 연극과 무관한데다 대부분 60세 이상으로 연령층도 높았다. 강도 높은 공연 연습이 지속되면서 링거를 맞으면서까지 참여하는 신자도 생겨났다. 발성부터 몸짓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지도한 김묘임씨 노력에 포기할 것만 같던 신자들은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나갔다. 신자들은 무대에서만큼은 배우로, 또 순교자로 변화하는 노력을 다져나갔다. 열심히 자신을 부수고 그 안에 역할을 집어넣는 연습에 집중했다. 소품과 무대의상, 인근 본당에 홍보할 포스터까지도 이들 손에 맡겨졌지만 불평대신 웃음으로 준비에 임했다.
최의정 야고보를 연기한 정후남(데레사)씨는 “처음에는 발성도 어렵고, 여자인 제가 남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 참 힘들었다”며 “하지만 14살 소년이 겪기에 너무 가혹한 현실이 가슴에 와 닿는 순간 ‘내가 야고보다’는 걸 체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배우들은 전문 배우 못지않은 연기로 관객들에게 감동적인 무대를 선사했다. 교우들은 평소와 다른 배우들 모습에 한 번 놀라고, 연기력에 두 번 놀랐다며 재공연 요청을 해왔다. 현재 울산대리구 복산본당(주임 이균태 신부)으로부터 재공연 요청을 받은 상태다.
김맹환 회장은 “처음에는 다들 어색해 했지만, 각자 최선을 다해 연습한 결과 놀라운 성장을 경험했다”며 “연극을 통해 삶을 대하는 자세가 변화됨을 느꼈고, 이 변화는 꽃바위본당 공동체에도 새로운 힘을 불어넣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큰 관심과 격려로 힘을 북돋워주신 천경훈 주임 신부님도 숨은 공로자”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순교신심 새롭게 되새긴 계기
이번 순교극에 참여한 신자들은 “무엇보다 순교신심을 새롭게 되새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 뜻 깊은 경험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하느님의 이끄심 속에 175년 전 순교자들이 현재의 자신에게 구체화되고 있음을 느꼈다고 밝힌다.
옥중 순교하는 에메렌시아 배역을 맡은 배영금(마틸다)씨는 “순교자들의 절박한 심정이 가슴으로 느껴져 연기하는 내내 울었고, 그 사이 영적으로 많이 성장했음을 느낀다”며 “이제 기도에 임하는 자세도 변화된 것 같다”고 말했다.
대본, 연출, 주연 이성례 복자 등 1인3역을 소화한 김묘임씨는 “순교자들의 삶을 접해야 하는 것은 당시와 현재에 똑같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기 때문”이라며 “시복시성 운동 역시 그분들은 물론이고 현재의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순교극 준비팀은 앞으로 극단 이름도 정식으로 짓고, 재공연과 새로운 공연을 준비해 신자들과 만남을 이어갈 계획이다.
천경훈 주임 신부는 “연습할 때부터 이미 눈물 흘리고 감동 받는 신자들 모습을 보며 이분들이 순교자들 삶에 보다 가깝게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며 “작은 본당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전국 신자들에게 순교신심을 되새기는 동기부여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