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원종현 신부)가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광복과 천주교회’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번 심포지엄 참가자들은 광복 후 남북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의 대응,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의 천주교회의 역할에 대해 논의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이사장 조규만 주교는 개회사를 통해 “여전히 남북이 분열돼 있고, 동서가 갈라져있고, 부자와 가난한 자 가르기가 한창”이라며 “과연 우리 교회는 무엇을 해왔을까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활약을 했는가에 대해 그리고 미래를 위한 우리의 몫을 고민하는 시간이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발표 요약.
미군정의 종교정책과 한국천주교회/ 박태균 교수(서울대학교)
“미군정 특혜 속 가톨릭과 개신교는 성장 기틀 갖춰”
일본은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종교에 대해서는 탄압했지만, 협조가 이뤄지는 종교에 대해서는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총독부에 의한 종교에 대한 개입과 강압은 1937년 중일 전쟁이 시작되면서 본격화됐다. 이른바 총동원체제가 시작되면서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성직자들도 예외 없이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종교인들이 일본의 전쟁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이 과정에서 친일 논란이 빚어지게 됐다.
광복이 되자, 종교계 역시 과거 부조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됐다. 일본 제국주의의 민족말살정책과 불의의 정책에 협력한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반도가 분할 점령됨에 따라 종교계는 스스로 과거의 부조리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정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미군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원칙을 두고, 대부분의 종교들을 통치에 이용하려는 정책을 실시했다. 그 중에서도 가톨릭과 개신교는 특혜를 받았다. 미군정은 한국의 물정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수립됐기 때문에 한국 사정에 밝은 선교사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선교사 또는 선교사의 자제였던 사람들은 일반 통역요원으로 활동했다. 더욱이 미국인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기독교 계열 인사들은 미군정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미군정은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지정하고, 매 주일마다 서울방송을 이용해 복음을 전국에 전파했다. 가톨릭의 경우 광복 직후부터 서울중앙방송국(HLKA)의 종교시간을 통해 월 2회 각 15분간 선교를 위한 종교방송을 했다. 아울러 출판사를 넘겨받아 경향신문을 발행했다. 반면 일본 총독부가 실시했던 유교와 불교에 대한 통제는 그대로 계속됐다. 미군정기를 통해 개신교와 가톨릭은 성장할 수 있는 틀을 갖추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광복 직후 해결했어야 하는 부조리를 척결하는 과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로 말미암아 종교계에서의 소위 ‘친일’ 논란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논평/ 노길명 명예교수(고려대학교)
발표자는 천주교가 일제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중요한 원인을 반공이데올로기에서 찾았다. 그러나 한국천주교회가 일제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은 발표자가 지적한 미군정의 통치전략이라는 외적 요인보다는 당시 천주교회가 지니고 있었던 역사인식이나 사회의식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천주교회가 미군정과 친화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관계를 바탕으로 일본이 남기고 간 어떠한 종교시설도 무상으로 받았거나 특혜를 받은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미군정의 종교정책은 오랜 기간의 박해로 인해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고 사회참여에 소극적이었던 천주교회가 민족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다종교 상황에서 천주교회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러한 민족사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는 곧바로 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광복 후 북한정권의 종교정책과 한국천주교회/ 김훈일 신부(청주교구 민족화해위원장)
“북한교회에 박해 이어지자 남쪽에서는 반공운동 독려”
한반도가 일제 치하에서 광복은 됐지만, 민중뿐만 아니라 지도자들 역시 미국과 소련에 의한 분단과 신탁통치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국천주교회는 광복 후의 상황을 이해하며 정치적인 입장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북쪽에 있는 교구들도 광복의 기쁨을 전하고, 정치적으로는 소련군을 환영하며 사태를 면밀히 살폈다.
분단과 더불어 한국천주교회는 북한의 교회와 남한의 교회가 서로 다른 상황을 맞이하게 됐다. 당시 남한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얻어 교회가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북한에서는 공산정권에 의해 날로 심한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북한의 천주교회는 선교활동의 자유를 위한 노력을 계속했고, 함흥교구와 연길교구의 관할 지역 안에서도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종교 활동이 용인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세력이 사회를 장악하며, 교회에 대한 직간접 탄압이 강화됐다.
소련군정은 북한지역에서 관대한 종교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한반도의 공산화를 위해 공산주의 세력의 토대가 확고하지 않은 북한지역의 다양한 계층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한에서 소련군은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주장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신앙의 자유에 대한 제약을 조금씩 높여갔다.
북한의 교회는 1948년 9월 9일 북한 공산정권 수립 후 종교 탄압정책으로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정권 수립 후 3개월이 지난 12월에 북한당국은 본격적으로 종교를 규제하기 시작해 덕원수도원에 머물고 있던 독일인 신부, 독일인 수사, 한국인 신부 등을 체포하고, 한국인 수사와 신학생을 모두 추방했다. 더불어 수도원의 모든 시설물을 몰수하고 폐쇄시켰다. 또한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원의 수녀들을 연금시키고, 평양교구에서는 교구장을 비롯해 사제들을 피살 및 체포했다. 탄압은 황해도 천주교회까지 미쳤고, 한국전쟁 전날까지 이북의 성직자, 수도자들을 일제히 검거했다.
한국천주교회는 북한지역에서 벌어지는 급속한 반교회 정책에 마땅한 대안을 세울 수 없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세력이 교회를 계속 박해하자 신자들에게 반공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독려했다. 교회 지도자들의 반공운동 독려에 힘입어 ‘통일단’ ‘가톨릭 십자군 유격대’ ‘장연중학교 동맹 휴학 사건’ ‘장련여중 학생의 반공 삐라 사건’ 등 능동적인 반공운동이 전개됐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강력해진 반공주의는 역으로 북한 교회가 공산주의 사회에서 그 토대를 상실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교회의 입장에서 신앙을 지키고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반공주의를 지지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논평/ 변진흥 박사(한국평협 평화위원장)
북한지역에서 각 교구와 선교회들의 대응이 체계적이지 못했고, 공조체제가 이뤄지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당시의 급격한 충격과 이에 따른 혼돈 상황에 대해 피상적으로 본 것이 아닌가 지적하고자 한다. 보다 정확한 자료들이 부재한 상황에서 이 같은 판단은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북한 종교정책에 대한 학문적 분석 틀이 제시되고 공유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로 보여진다. 따라서 교회사 19세기 중반부터 공산주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바티칸이나 남한교회 그리고 북한교회가 공조하면서 국제적인 역할관계에서 빚어진 한반도 분단과 북한 공산화과정에 대해 현실적인 대응전략을 세우고 이에 신속히 대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생각된다.
1940년대 천주교회의 한국선교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최선혜 연구교수(가톨릭대학교)
“광복 후 교황사절 한국에 파견
교황, 대한민국 정부 수립 환영”
대한제국은 한일병합조약으로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상실하였지만, 한국천주교회는 조선대목구 설정 이래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종교의 일원이었다. 보편교회의 지체로서 한국천주교회에는 한국인 성직자, 수도자와 더불어 서양의 여러 선교회와 수도회 소속 선교사들이 진출해 활동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아이들에 대한 선교와 교육, 노인에 대한 구호와 평범한 한국인이 개종한 다양한 사례 등을 소개하며 관심과 후원을 호소했다. 특히 메리놀회는 한국은 한국인 스스로가 교리를 공부해 선교사 활동을 시작한 곳이라는 의미를 강조했다.
태평양전쟁 발발로 한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추방되거나 감옥에 연금됐다. 선교사들은 추방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반드시 다시 돌아가기를 강력하게 희망했다. 그들은 한국천주교회사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보였고, 한국인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점과 박해를 이겨내고 믿음을 지킨 민족임을 널리 알렸다. 아울러 한국인 성직자와 수도자의 활동에 큰 신뢰를 드러내고, 일제가 천주교회에 대해 취한 부정적 정책을 비판했다.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메리놀회를 중심으로 한 미국 천주교회는 한국 문제에 대한 의견을 교회 내부만이 아니라 트루먼 대통령과 정부 고위 관료들에게까지 전달했다. 교황청 포교성성에 한국에서 선교활동의 재개를 요청, 전폭적인 지지와 승인을 받았다. 또한 ‘한국을 위한 가톨릭’을 조직해 일반 대중에게까지 한국에 대한 관심과 정보를 확산시켜 나갔다. 한국에 대한 신의를 지켜 지난 잘못을 바로잡아 한국인의 자유와 독립을 지원하며 선교의 사명을 완수하기를 원하는 메리놀회의 움직임은 결국 한국의 정부수립 지원으로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선교사들을 추방해 한국천주교회에는 잠시 공백이 생겼지만 이는 한국 천주교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고 한국에 대한 선교의 열망이 국제적으로 더욱 강조되는 결과를 낳았다. 종전 후 교황청이 한국선교 재개를 승인하고 교황사절까지 파견한 일은 이와 같은 노력이 맺은 결실이라 볼 수 있다.
유엔의 결의에 따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1948년 1월 9일 서울에 입국했다. 선거는 결정됐지만 새로 탄생할 정부의 대표성이 문제였다. 총선을 거쳐 수립된다고 하지만 선거를 치르는 지역이 38선 이남에 국한되므로 ‘거국정부’로 인정하는 여부는 논란이 예상되는 문제였다. 교회는 신생 정부가 거국정부로 승인받는 일을 지지했다. 교황도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주권으로 가진 국가로 승인되는 일을 추진한 유엔의 관심과 전적으로 일치해 왔다고 전했다. 교황청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환영한다고 발표하고, 교황사절인 번 주교를 최초 주한 교황대사로 격상·임명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승인은 한국 천주교회사의 역사적 저력이 바탕하고 있었기에 거둘 수 있던 열매였다.
▶논평/ 허동현 교수(경희대학교)
한국의 독립과 자치정부의 수립을 위한 메리놀회의 활동이 1947년 초까지 미국정부의 한반도 정책 변경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이유도 함께 서술하면 좋을 것 같다. 미국의 전략가들은 한반도를 중국대륙에 부수된 지역으로 봤기 때문에 한반도만을 고려한 전략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중국 내전의 승패가 안개 속에 쌓여있던 1947년 초까지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현상유지에 초점을 맞춘 정책이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지 4개월 뒤인 1947년 9월 미 국무부는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 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는데, 이는 미국이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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