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더위가 좀처럼 물러가지 않던 9월 9일 오후. 선글라스를 멋지게 맞춰 낀 30대 남녀 커플이 서해 최전방 교동도 대룡시장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일산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양정욱씨는 “대룡시장이 한국전쟁 기간 중 피란민들이 만든 시장이라는 소문을 듣고 처음 알게 돼 인터넷 검색에서 좀 더 알아본 후 남자친구와 같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장소여서 새롭게 바라보게 됐다”고 방문 소감을 전했다.
안양에서 왔다는 중년 남성들도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대룡시장 곳곳을 둘러보다 ‘(사)새 우리누리 평화운동’(대표 김영애) 부설 실향민 스토리텔링장인 대와공방 앞에서 멈춰 섰다. 대와공방은 대룡시장에서 연백군 실향민이 60년간 운영하던 신발가게가 문을 닫고 3년간 방치되고 있던 공간을 리모델링해 지난해 11월 개장했다. 이곳에서 김영애(데레사) 대표로부터 교동도에 연백군 실향민들이 몰려오게 된 역사적 배경과 교동도가 분단 상황에서 갖는 지리적 의미를 설명 들은 남성들은 “어렴풋이만 알고 대룡시장에 왔는데 교동도가 통일 한국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정확히 알게 돼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분단의 상징이자 통일의 희망인 교동도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늘고 있다. 지난해 6월 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부터다. 교동대교 길이는 3.4km로 교동도 망향대(望鄕臺)에서 북녘땅 연백군까지 직선거리와 별 차이가 없다. 날씨가 좋은 날 망향대에서 바라보면 연백군 해안과 어선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이는 연백군의 산수가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7월을 전후해 교동도와 같은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던 연백군민 3만 명이 교동도로 이주했다. 당시 교동도 본래 인구가 9000명이 채 되지 않던 때다. 3만 명이나 되는 연백군민들은 생활 기반이 전무하던 교동도에서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해야 했고 이 가운데 절반은 강화도와 평택 등 인근 경기도 지역으로 다시 이주해야 했다.
교동도에 남은 연백군 실향민들은 한국전쟁 정전과 동시에 휴전선이 연백군과 교동도를 갈라놓으면서 영영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교동도에 정착한 연백군 실향민들이 하나 둘 모여 생계수단으로 만든 시장이 지금의 대룡시장이다.
9월 9일 찾은 대룡시장은 마치 영화 촬영 세트장으로 일부러 꾸며 놓은 듯한 인상을 던져줬다. 1960~80년대 전성기에 200여 개나 되던 점포는 실향민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인수자가 없어 폐업돼 현재 운영 중인 점포는 50~60개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아직도 성업 중인 ‘연안정육점’ 간판은 비록 칠이 군데군데 벗겨지긴 했어도 연백군 연안읍이 자신의 고향이라는 신원을 밝히고 있어 대룡시장의 생명력을 실감케 한다. 간판도 없이 같은 자리에서 ‘만물상’이라는 이름으로 통하며 60년째 영업 중인 안순모(예비신자·84)씨는 “연백에서 살다 남편과 함께 교동도에 피란와 평생 대룡시장에서 장사해서 자식들을 의사와 대기업 간부로 키웠다”고 60여 년 세월을 압축해 들려줬다. 교동이 고향으로 대룡시장에서 55년째 시계와 도장 가게를 운영하는 황세환(77)씨는 “연백 실향민들이 대룡시장을 만들어 정말 열심히 일했고 과거에는 육지와 교통이 불편하다 보니 교동 주민들에게 대룡시장은 모든 생활용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었다”고 말했다. 개풍군 출신으로 한국전쟁 후 친형을 따라 교동도에 자리잡은 유득호(요셉·84)씨는 “대룡시장 덕분에 교동도가 풍족한 섬이 됐다”고 기억했다.
대룡시장 구석구석을 살펴보다 보면 눈에 띄는 안내문구 표지판들이 있다. ‘제비들이 내년에도 교동도에 찾아오도록 너무 가까이 다가가 제비들을 놀라게 하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다. 연백군 실향민들은 해마다 찾아오는 제비들이 고향 연백군의 공기와 흙냄새를 가져다 준다고 생각한다. 제비들이 사람보다 귀한 손님으로 여겨질 만도 한 것이다.
교동도와 대룡시장에서 각박한 삶을 개척했던 연백군 실향민들은 매해 명절이나 조상 기일에 망향대에 오를 때마다 ‘격강천리(隔江千里)라더니’라는 시(이범옥 체칠리아 작)를 떠올린다. 망향대와 연백군까지는 10리나 될까한 거리지만 시 제목 그대로 강이 갈라놓은 거리가 천 리처럼 먼 것이 교동도에 정착한 연백군 실향민들의 한이다.
‘인간이 최고라더니 날짐승만도 못하구나. 새들은 날아서 고향을 오고가련만 내 눈에는 인간을 조롱하듯 보이누나’는 싯구가 대룡시장의 제비를 바라보는 시인과 실향민들의 심정을 사무치게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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