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계절. 흔히 가을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한국인으로서 참으로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사계절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네 계절은 우리에게 단조로움을 떠나 풍요함을 선사합니다. 이런 자연의 변화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감성과 생각을 갖도록 해 줍니다.
한가위에 맞게 오늘 독서 말씀은 모두 풍성함과 수확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엘서는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비는 하느님의 은총과도 같습니다. 농경 사회에서 비는 땅으로부터 소출을 내는데 절대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과학의 발전으로 예전보다 쉽게 물을 저장하고 필요할 때 쓸 수 있지만 고대 사회에서 비는 절대적이라고 말할 만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은총으로 땅은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되리라는 것이 요엘서의 예언입니다.
한편, 요한 묵시록은 조금 다른 의미의 수확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자연적인 수확이 아닌,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라는 천사의 외침은 이제 세상에 종말의 때가 왔다는 의미와도 같습니다. 성경에서는 자주 종말과 심판을 나타내기 위해 곡식의 수확이라는 표상을 사용합니다. 마치 가을이 되어 곡식이 익으면 이것들을 모아 들여, 좋고 나쁜 것을 가리는 것처럼 종말의 때에 하느님의 심판은 그렇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는 말씀은 한편으로 두려움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한 일을 잊을 수 있지만, 그 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씀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앙인들에게는 영원한 안식이 그리고 그들을 박해하는 이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심판의 말씀은 오히려 믿는 이들에게는 희망을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연을 통해, 풍성한 소출을 보여지는 하느님의 은총, 그리고 종말 때에 이루어질 심판 역시 무서운 표상들과 함께 소개되지만 결국 하느님의 은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복음은 부유한 어떤 사람에 대한 비유를 전합니다. 소출이 많아 그것을 모두 곳간에 모아둘 수 없는 어떤 부유한 사람. 그는 궁리 끝에 곳간을 새로 짓고자 하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목숨은 하느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이 비유의 가르침은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쌓아둘 곳이 없는 곳간을 가진 부유한 사람은 자신 만을 위한 더 큰 곳간을 마련하는 해결책을 생각해 냅니다. 루카 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부와 가난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나 가난 자체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그것을 나누지 못하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추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 역시 부유한 사람의 해결책에는 이웃이나 나눔은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탐욕’의 예로 이야기하십니다.
오늘은 한가위입니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처럼 한가위는 가장 풍성한 계절의 명절입니다. 돌아가신 조상들을 기억하고, 고향을 찾고 또 가족들과 함께 모여 정을 나누는 것은 명절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풍성함을 함께 나누고 즐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우리의 눈이 주위를 둘러볼 수 있다면, 우리 이웃들의 어려움 역시 함께 생각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허규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1999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독일 뮌헨 대학(Ludwig-Maximilians-University Munich) 성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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