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치유피정’. 수도원 체험에 문학을 더한 피정이라…. 신선하면서도 생소했다. 여느 인문학 강의처럼 글을 읽으며 무엇인가를 끌어내는 것이 아닌, ‘나’에 대한 자전적 소설쓰기를 통한 심리 치유 프로그램이라 더욱 그랬다.
9월 18일부터 20일까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서 열린 ‘문학치유피정’. 시인 구상 선생의 딸인 소설가 구자명(임마쿨라타) 작가와 그의 남편 서양화가 김의규(가브리엘) 작가가 그림과 글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작업을 이끌어갔다. 파주에서, 춘천에서, 지리산에서…. 왜관수도원을 찾은 50여명의 참가자들은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을까.
나만의 언어를 찾아라
본격적인 소설쓰기 강의가 시작된 둘째 날.
먼저, 감정과 마음 들여다보기. ‘기쁨, 화,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바람’ 7가지 감정이 담긴 얼굴카드로 이야기를 엮어가는 작업을 했다. 여기에 무지갯빛 7가지 색깔카드로 앞서 만든 이야기에 배경과 분위기를 만드는 시간이 이어졌다.
김의규 작가는 이 과정을 지도하면서 ‘나만의 언어를 찾아내라’고 강조했다.
“빨강색은 정열적인 색이라고 흔히들 생각합니다. 왜 빨강은 정열적이어야만 할까요. 어떤 이들은 초록색을 볼 때 가슴 뜨거워질 수도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배워온 교육 때문에 판단과 선택에 있어서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죠. 처음 드는 마음, 그것을 잡아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7가지 색들은 자신만의 기억과 감각의 색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노랑, 개나리 피어있는 시골집 담” “파랑, 20가지 색실 사서 꽃 수놓을 때 선택했던 색” “초록, 겨울의 소나무 같다” “보라, 마냥 기다리고 싶다”…. 굳어진 생각에서 벗어나, 가슴 속 저 깊이에 있는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글쓰기는 시작됐다.
나의 이야기 ‘한뼘자전소설’
‘한뼘자전소설’. 아주 짧은 분량(원고지 10매 이내)의 소설형식으로 쓰는 자서전이다.
자서전이 생애 전체를 비교적 사실적으로 다루는 것이라면, 한뼘자전소설은 생애의 특정 국면이나 사건을 소설형식으로 돌아보는 글쓰기다.
구자명 작가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가족과 사회에 열린 마음으로 다가감으로써 소통을 통한 심리 치유를 지향한다”고 설명했다.
구 작가가 활동하고 있는 한국미니픽션작가모임에서 지난해 4월부터 서울 은평병원 의료진에게 한뼘자전소설 쓰기를 교육해,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문학치료프로그램을 운영해왔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는 이번 왜관수도원 피정에서 처음 마련됐다.
글을 쓰면서 치유와 회복
본격적인 소설쓰기에 앞서, 김 작가가 말했다.
“이 순간 느끼는 감정으로도 작품을 구성해갈 수 있어요. 꼭 이야기의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됩니다.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글을 써보세요.”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가족을 지켜봐야하는 고통, 치매 시어머니 병수발하며 힘들었던 지난날,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 삶을 돌아보며 한 줄 한 줄 써내려갔다. 북받치는 감정에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기쁨, 화,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바람. 비워내고 내려놓았다. 그럴수록 종이는 빼곡히 채워져 갔다.
조순임(로사·부산 이기대본당)씨는 “병원을 개업한 남편을 도와 함께 일을 하면서 심신이 지쳐갔고, 일에 치여 하루하루를 보내다 영적으로도 무감각해졌다”면서 “수도원에 온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었는데, 힘들었던 일들을 글로 쓰면서 더욱 힐링이 된 것 같다”고 기뻐했다.
공지영 작가의 「수도원기행2」를 읽은 아내의 권유로 이번 피정에 함께 온 김진동(시몬·대전 도룡동본당)-우미경(루치아)씨 부부는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프로그램일 듯하다. 아이를 혼내기보다 감정을 글로 쓰게 함으로써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참가자는 “어느 정도 인생을 살다보면,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오늘의 작업도 그러한 정리의 한 부분”이라고 전했다.
문학 치유에 관심이 있다면, 한국미니픽션작가모임에서 펴낸 한뼘자전소설 쓰기 이해와 작법을 다룬 「내 이야기 어떻게 쓸까?」(호미), 작가들의 자전소설 모음집 「나를 안다고 하지 마세요」(나무와 숲)를 읽어도 좋겠다.
왜관수도원은 이번 문학치유피정 참가자들이 쓴 자전소설을 책으로 엮어서 보내주려 한다. 수도원에서의 가을날 추억이 삶의 힘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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