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 시절, 찬 공기가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지는 시월이 되면, 저녁식사를 마치고 어둠이 밤안개처럼 퍼져가는 신학교 정원에서 산책하며 입을 모아 노래 불렀던 ‘시월의 연가’인 ‘잊혀진 계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나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누군가 한사람이 부르기 시작하면 몇 사람이 따라서 불렀고 몇몇 사람이 함께 부르다 보면 어느새 모두가 부르는 노래가 돼있었다.
우렁차게 울리던 이 노래는 가을남자들의 계절 본능처럼 해마다 정확하게 기억되어, 마치 ‘잊혀짐’에 한 맺힌 사내들이 가슴속의 응어리를 토해내는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우렁차게 메아리쳤다. 감수성이 예민한 신학생들이 ‘건너야 할 이별의 강’을 건너며 떠나보낸 인연들을 잊지 못하고 기억하는 노래였는지, 떠나는 가을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하려 했는지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지만, 말로 표현 못할 미묘한 가을 감수성의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분명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속 시원하게 노래를 부르고 나면 선후배 모두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박수를 치고 함께 웃었다. 노래를 통한 공감의 희열은 버려짐과 상실의 상처가 ‘기억’을 통해 치유되고 극복되는 감성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인간의 상처는 오히려 ‘기억함’을 통해 공유되고 그 상처에 공감함으로써 ‘기억의 연대’라는 치유를 낳게 되는 것이었다. 연대는 개인의 상처가 더 이상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모두가 그 상처에 책임이 있음을 자각하고 공유할 때 더 놀라운 치유와 극복의 힘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치유가 인간의 역사적 사건 안에서도 가능한 것이 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방구들장 신부님께서 미리내 ‘유무상통’ 마을에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을 하실 때 모셔온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을 들을 때였다. 일본 제국에 의해 ‘잊혀진 소녀’가 되어 당신께서 겪으셔야 했던 끔찍한 기억들을 증언한다는 것은 다시금 그때의 사건을 기억함 때문에 너무도 고통스러운 상처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모든 것을 또렷이 용기 있게 기억하셨고 증언하셨다.
일본 정부에게 강력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한국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를 비판하시며 “나는 아직 독립도, 해방도 되지 않은 조국에 살고 있다!”는 외마디의 외침에 내 마음속에 지난 온 역사에 대한 ‘아픔’이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네, 맞아요 할머니! 이제야 제가 아파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네요!”라고 외치고 싶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상처는 나의 상처였고, 당신의 고백은 또한 나의 고백이기도 했다. 할머니들께서 받으신 상처와의 연대를 통해서 나 또한 그분께서 받으신 상처에 ‘책임’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역사가 남겨준 상처에 대한 치유의 책임을 함께 나누는 것이 연대의 첫걸음이었다.
기억하자. 무엇이 우리 시대의 상처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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