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의 두 번째 본당 평택대리구 미리내본당(주임 류덕현 신부)은 김대건 성인의 유해가 묻힌 성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등 대규모 박해가 이어지자 서울과 경기, 충청도 지역의 신자들이 이곳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밤 중 계곡을 따라 빼곡히 들어선 신자들 집의 등불은 마치 은하수와 같았다 해서 은하수의 우리말인 ‘미리내’라고 불렸다.
1846년 순교한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1853년 선종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이 미리내 땅에 묻혔다. 박해시기 접근이 쉽지 않은 산간 경계지역에 자리 잡은 미리내 지역은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의 유해를 모신 거룩한 땅에 산다는 자부심과 굳건한 신앙을 바탕으로 교우촌을 일궈냈다.
이 땅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도 일찍부터 박해를 피하고 사목을 하기 위해 미리내를 사목활동의 근거지로 삼아왔다.
교우촌은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본당이 설립된 것은 1896년이다. 한국교회 최초의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가 묻힌 이곳에 국내 첫 사제서품식에서 서품된 강도영 신부가 발령받았다.
미리내본당 신자들은 대부분 산속에 밭을 일구거나 옹기를 구워 팔던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였다. 초대 주임이었던 강 신부는 신자들에게 성전건축기금을 내라고 말하는 대신 주일미사에 올 때 주변에서 돌을 하나씩 주워오라고 했다. 그렇게 신자들이 모아온 돌로 1907년 성전을 완공했다. 비록 고급 건축재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내구력이 약해 중간에 여러 차례 보수했지만 지금도 돌로 지은 성당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본당은 사제관과 학교 건물도 신축, 해성학원을 설립했다. 학교는 한글과 역사는 물론이고 교리도 가르쳤다. 이를 통해 본당은 안성 지역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또 미리내 지역 농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고자 양잠과 농업기술도 전수했다.
설립 당시 1779명이었던 본당의 신자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13년에는 신자 수 3043명으로 교구 내 본당 중에서 신자가 가장 많은 본당이기도 했다.
본당이 위치한 미리내와 은이 지역은 대대로 신자들의 집안이 거주하던 곳으로 신자들의 두터운 신앙심이 복음화의 씨앗이 됐다.
본당은 1920년대 이래 교구 지역에 많은 본당들이 신설되면서 본당의 관할 지역이 축소됐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까지도 용인시 남부와 이천시 서부지역을 담당하면서 지역 복음 전파와 사목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했다.
현재 미리내본당의 신자 수는 800여 명에 불과하지만 미리내본당은 박해시기부터 내려오는 신앙의 전통을 지키고 성인의 삶과 신앙을 기리고 닮아가려는 순교자 현양의 근원지로서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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