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냅니다.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아직 한 해가 조금 더 남았지만 전례 안에서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 셈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에 우리는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마치 왕처럼 예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왕으로서의 예수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십자가 위에 걸렸던 죄목입니다. ‘유다인들의 왕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표현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의 죄목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비록 십자가 형이라는 형벌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왕이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비슷한 표현을 발견하게 됩니다. 빌라도는 묻습니다.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이 질문에 예수님은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의 죄에 대해 심문하는 장면이지만 여기서도 역시 빌라도는 예수님을 왕이라고 또 예수님 스스로도 그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번에 걸쳐 빌라도는 예수님께 임금이냐고 묻습니다. 질문의 형태이기는 하지만 마치 빌라도의 입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요한 묵시록에서도 역시 이러한 사실이 언급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통치는, 그분의 다스림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요한 묵시록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요한 묵시록의 표현은 오늘 제1독서에서 들은 다니엘 예언서의 그것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오늘의 말씀은 모두 왕이신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왕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가실 것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다스리는 나라. 이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복음을 따라 살아간다면 이 나라는 먼 훗날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가르침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인지, 무엇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구원을 위한 삶인지, 또 어떤 마음으로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신앙인의 모습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이것이 실현된다면 이미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스리는, 그분이 이끄는 나라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나라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땅이나 지역, 그리고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알지 못해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알지만 여러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알고는 있지만 여러 걱정들과 욕심들 때문에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이 되면 사람들은 흔히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회고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은 필요합니다. 한 해 동안 나는 얼마나 나의 믿음을 위해 노력했는지, 또 얼마나 실천하며 살았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꼭 반성과 참회를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나의 부족함을 알 때 우리는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복음생각에 관심 가져 주신, 부족하고 건조한 묵상과 글이지만 함께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청하며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허규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1999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독일 뮌헨 대학(Ludwig-Maximilians-University Munich) 성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 이번호로 허규 신부의 복음생각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수고해 주신 허규 신부님과 애독해 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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