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뿌리를 내린 양평지역은 교회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용인대리구 용문본당(주임 곽중헌 신부)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신앙의 뿌리를 내려온 양평지역 신자들의 터전이다.
양평지역은 조선 천주교회의 초기 신앙선조인 권철신(암브로시오)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살던 곳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많은 학자들이 양평·광주·여주가 맞닿은 천진암에서 강학회를 열어 교리를 연구하고 그 내용을 실천하면서 신앙을 키워 나갔다.
양평지역은 연이은 박해로 겨우 명맥만 유지할 정도로 교세가 미미해졌지만, 1886년 신앙의 자유를 얻으면서 공소들이 생겨났다. 공소를 중심으로 양평지역 신자들이 증가하자 퇴촌에 조제신부가 부임했다. 바로 용문본당의 시초였다.
설립 당시 본당은 신자들이 구입한 민가를 성당으로 사용했다. 본당은 퇴촌이 지리적으로 외지고 협소해 전교에 어려움이 있다고 여겨 1915년 용문면 마룡리(마내)로 이전했다. 본당은 당시 경기도 포천·여주 일대와 강원도 화천·양구·춘천 등의 23개 공소와 1567명의 신자들을 사목했다. 1939년 당시 서울대목구장 라리보 주교가 방문했을 때는 120여 명에게 견진성사를 주는 등 신심이 크게 성장했고, 본당 출신 수도자와 성직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1943년 양평본당이 설립 이후 공소와 본당 사이를 오갔다. 양평본당의 설립으로 양평본당 공소가 됐을 뿐 아니라 6·25전쟁 중에 성전이 반파되기에 이르렀다. 1958년에는 김영근 신부의 부임으로 다시 본당으로 부활하고, 교세를 확장해 청운면 여물리에 공소를 만드는 등 활발한 선교가 이뤄졌다. 하지만 김 신부의 은퇴 후 후임이 오지 않아 다시 공소가 됐다.
공소에 머물던 용문이 다시 본당이 된 것은 1967년이다. 부활한 본당은 본당 사목 내실화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펼쳤다. 1970년 본당 첫 레지오마리애 쁘레시디움인 ‘매괴의모후’가 설립됐고, 11개 공소를 관할하던 본당은 ‘공소 신심회’를 조직했다. 공소 신심회는 공소 신자들의 신앙심을 북돋을 뿐만 아니라 본당 내 공소 사이의 격차를 없애고 공소 신자 전체가 본당 운영에 참여하도록 돕는 단체였다. 본당이 앞장선 가운데 교구 내에 전개된 ‘공소 신심회’는 활기찬 농촌본당의 모습을 만들어 나갔다.
1992년 지금의 성전을 건립한 본당은 2008년 100주년 기념미사와 축하행사를 열었다. 현재 본당은 2300여 명의 신자들을 중심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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