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때로 그 시작은 인간이 하지만 과정을 돌아보면 하느님께서 다 해주고 계시다는 것을 생생히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그만두고 싶은데, 결코 그만두지 못하곤 합니다. 인간적인 마음에서야 ‘그만!’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하느님께서 하신다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혼자 투덜거리면서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하느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을 보여 주십니다.
한 달에 한 번 전국에 있는 교회 사적지나 순교지 등을 찾아가는 ‘주제가 있는 순례’를 다니고 있습니다. 새로운 순례 문화를 정착하고자 나름대로 시도한 ‘주제가 있는 순례’가 어느덧 4년이 훨씬 넘었고, 이제 새해에는 5년째 접어듭니다. 올해는 ‘순교자가 나에게 말을 건네다’라는 주제로 순례를 다니고 있으며, 순례 동안 순교자를 비롯하여 신앙의 선조들이 건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노력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저가에 알찬 명품 순례를 지향하며 준비했던 프로그램이라 올 초까지 나름대로 많은 분들이 신청을 해서 아주 ‘쬐끔’ 여유 있게 순례를 다녔는데 메르스 때문에 한 번 취소하고 9월에 순교성월이라 바빠서 연기를 했더니 10월에는 최소 인원으로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11월에는 아예 순례 인원이 채워지지 않아 고육지책으로 내가 있는 성지 봉사자들에게 함께 순례를 가자고 간절하게 권유하기까지 했습니다.
최-최소의 인원으로 대형버스 한 대를 타고 순례를 떠나는 날 아침. 가을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날씨는 스산하게 춥고, 더욱 힘든 것은 전체 책임을 맡고 있는 내 마음이 그리 밝지 않았습니다. 출발 장소에 우산을 쓰고 가는데 함께 갈 순례자분들은 해맑은 표정으로 인사를 해 주셨고, 버스 기사님이 차량 대절비를 할인해 주었고, 심지어 물 한 통씩 선물로 가져오셨습니다. ‘세상에 죽으라는 법만 없구나!’
출발 시간이 되어 출발 기도를 바치고 잠시 아침을 김밥과 물 한 통으로 나눈 후 순례자 한 분이 손수 싸가지고 온 미니 샌드위치도 다 같이 먹었습니다.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아, 넉넉하게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데, 창밖으로 부딪히는 빗방울이……. ‘아, 이 프로그램을 계속해야 하나! 이제 내가 안 하더라도 누군가 하겠지!’
그렇게 오랜만에 생수와 눈물의 김밥을 먹고, 다시금 창밖을 바라보는데 아련한 어둠을 딛고, 새벽 여명이 천천히 하루를 열고 있었습니다. 순간, 하느님이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하루를 선물로 주셨구나, 싶은 마음이 들면서 마음 한구석에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하느님!’을 외치며 다시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아침으로 김밥을 다 먹은 후에 평소처럼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차 안에서 순례지 정보와 소개, 순례지의 역사적 의의와 그곳에서 순교한 분들의 삶과 신앙을 그날따라 구수한 숭늉처럼 이야기를 풀어갔습니다. 비록 몇 분이 안 계셨지만, 한 분도 빠짐없이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마지막으로 순례의 참된 의미를 설명해 주고 났더니 순례지에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목적지인 곳에 다다랐더니 산속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함께 간 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차 안에서 이제 모든 것을 설명 다 드렸으니, 이제 이곳에서 순례는 여러분 각자가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침묵할 때, 그 침묵 속으로 순교자들에 말을 건네실 겁니다. 그분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셔요.”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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