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 전시관 관람은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가능하며 신자를 포함해 방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하고 있다. 사전에 연락을 해 놓으면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 인보성체수도회 용인수도원 안에 자리한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유물 전시관’ 전시공간 모습.
윤을수 신부(1907~1971) 유물 가운데 가장 먼저 소개할 것은 「라한사전」(羅韓辭典, Dictionarium Latino-Coreano)(1936년)이다. 1907년 충남 예산군 고덕면 용리에서 부친 윤상규 이냐시오와 모친 임 골롬바의 2남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윤 신부는 1920년 9월 13일 서울 용산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932년 12월 17일 명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서품 후에 장호원본당(현 충북 감곡본당) 보좌신부로 있으면서 「장호원 성가집」을 발간했다. 그 후 1937년 프랑스 유학 전까지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 교사를 역임했다. 이때 윤 신부는 교리와 라틴어를 가르쳤고 「라한사전」도 이 시기에 편집, 발행했다.
「라한사전」 표지에는 라틴어「DICTIONARIUM LATINO-COREANO」라고 제목이 쓰여 있고, 서문과 약어부록, 본문 780쪽으로 구성돼 각 쪽마다 2단으로 편집돼 있다.
「라한사전」의 초판 발행일은 소화 11년 7월 31일, 즉 1936년이고 편집인은 윤을수, 발행인은 원순근이며 발행처는 서울 혜화동에 있는 성 니콜라오 신학교로 표기돼 있다. 인보성체수도회 유물관에 전시돼 있는 것은 똑같은 것을 1959년 경향신문사에서 다시 발행한 것이다.
▲ 윤을수 신부가 편찬한 「라한사전」 본문 중 일부. 모두 780쪽, 2단으로 편집했다.
윤 신부의 소신학교 제자였던 조응환 신부(1920~2002)의 증언에 의하면 윤 신부는 라틴어 교사였는데 라틴어를 아주 잘 가르쳤고 밤늦게까지 연구했다고 한다. 소신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는 것이 계기가 돼 사전 발행으로까지 이어졌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하는 증언이다. 번역은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을 넘어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하고 매개해 준다는 의미에서 낯선 세계 간의 만남이고 뛰어난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번역은 애초부터 두 세계의 완전한 일치를 기대하기가 어려운 일이기에 어려움과 고통이 따르는 일이다. 그 힘겨운 작업을 해낼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윤 신부는 서문에서 사전을 발행하게 된 동기에 대해 밝히고 있다. 그때 당시 사용하던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 주교의 「라선소자전」(羅鮮小字典, Parvum Vocabularium Latino-Coreanum)으로는 라틴어가 본질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 사전에 배분돼 있는 어구표현 또는 표현 방법이 너무나 옛날 방식이라는 것이다. 여전히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어구가 좀 더 풍부하고 시대에 적절한 사전을 발행하기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능통하다고는 하나 조선말을 제대로 배워 본 적도 없고 더구나 숨어 지내며 사목활동을 해야 했던 외국 선교사들이기에 그들의 번역, 표현법, 어휘선택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라틴어를 전례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용어처럼 사용해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고 표현하고 싶은 당위성과 필요성이 컸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윤 신부가 신학교를 다니고 동성소신학교 교사로 재임할 당시 소신학교를 ‘라틴어과’라고 부를 만큼 라틴어는 소신학교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가르치는 과목이었다.
당시 교회의 공용어와 전례용어가 라틴어였기 때문에 사제가 되려면 반드시 라틴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 당시 신학교 내에서는 일상에서도 라틴어를 해야 했고 한국말을 사용하다 들키면 엄중한 벌을 받아야 하는 규정이 있을 정도로 라틴어 사용이 의무였다. 이 의무는 의외로 좋은 결과를 냈는데 용산신학교의 라틴어 수준은 로마 교황청에서도 인정해 줄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가 「라한사전」을 태동하게 하지 않았을까?
윤 신부가 쓴 사전의 서문에 보면 사전을 만들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주위 사람들의 권고와 지도가 있어 라틴어 연구와 사전에 관한 경험이 없음에도 사전을 발행하기로 했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이 사전이 윤 신부 의도로만 제작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교회 내 지식인들, 특히 동성소신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사람들 사이에 그 필요성에 대해 충분히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고, 사전의 발행에 그들의 직간접적인 참여가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서문 말미에 사전 발행에 관해 많은 노력과 지지를 아끼지 않은 이들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는 임충신 신부(1907~2001), 안응렬(1911~2005), 이동구(1904∼1943), 장면(1899~1966)이 그 지지자들일 것으로 여겨진다.
라틴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할 만큼 라틴어에 익숙한 조선 사람인 윤 신부에 의해 번역된 「라한사전」이 갖는 사전학과 언어학적 관점에서의 높은 가치와 중요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이제부터 시작해야 할 연구과제다. 이 사전은 1990년대까지 통용된 유일한 라틴어-우리말 사전이었다. 「라한사전」에 등재된 한국어 단어들이, 물론 그 의미가 없어지거나 확장된 것이 있긴 해도, 발간 후 80년이 지난 지금에도 큰 변동 없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우수성은 충분히 증명된다고 본다.
※문의 031-334-2901~2 인보성체수도회 용인수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