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회에 존재하는 엄청난 격차와 빈부 사이의 뿌리 깊은 증오를 해소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모두 상실한 수많은 우리 가난한 형제들이 입은 깊은 도덕적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산업혁명기 기계가 노동력을 대체함에 따라 일자리를 잃은 이들은 증가하고, 노동자의 임금은 급락했다. 노동자들은 대량의 노역에 시달렸다. 심지어 5~6살 정도의 어린이들조차도 면직 산업에 동원, 학대를 받아가며 일하다 죽곤 했다.
1811년 12월 25일 독일 뮌스터에서 태어난 엠마누엘 폰 케틀러(Wilhelm Emmanuel von Ketteler)는 1844년 사제 서품을 받고 뮌스터 인근 베쿰의 보좌 신부로 임명됐다.
지역 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면서 사회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1850년 마인츠의 주교로 서품된 이후에도 꾸준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했다.
사회적 병폐로 인해 영혼과 육신이 망가져 가던 사람들에 대한 케틀러 주교의 헌신은 그를 ‘사회 정의의 주교’라 불리게끔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독일 마인츠에서는 ’노동자의 날‘에 그를 기리며 경축하는 행사를 연다.
케틀러 주교는 사회적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와 교육이야말로 시대적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라 판단했다. 그는 간호 사업에 종사하는 수녀회를 교구에 두는 것이 적절한 해결책이라 생각해 여러 수도원에 이 문제를 의뢰하고 협조를 요청했으나 도움을 얻지 못했다.
1851년 소수의 여성들이 케틀러 주교의 지도 아래 수도생활을 하고자 모였고, 그해 9월 29일 훗날 천주섭리수녀회가 될 ‘천주섭리교육간호수녀회’가 창설됐다.
마리 드 라 로쉬 수녀가 수녀원 초대 원장으로 임명됐고, 수녀회는 교육 사업과 병자 및 가난한 자에 대한 봉사에 투신했다. 회원들은 캐틀러 주교의 교회에 대한 충성, 사회적 관심과 참여, 참되고 올바른 것에 대한 두려움 없는 옹호를 반영하고자 노력했고, 초대 원장인 마리 수녀의 정신을 이어받아 겸손과 온유, 단순성의 모범을 본받고자 했다.
공동체는 1861~1871년 사이에 24개 학교, 4개 학원, 5개 직업학교, 4개의 유치원을 운영할 정도로 성장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안내를, 혼돈에 빠진 이들에게는 상담을, 가난한 이들에게는 우선적으로 필요한 영육 간의 원조를 제공한다. 또한 고독과 절망을 겪는 이들에게는 안정과 희망을 전달하는 것이 수녀들의 임무다.
한국교회와는 1964년 1월 대전교구 백남익 신부 도움으로 한국인 지원자 13명이 수련을 시작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수녀회는 어린이들을 위한 ‘섭리 유치원’, 이주노동자의 안정을 위한 음식봉사를 펼치는 ‘섭리 나눔의 집’, 노인양로시설 ‘애덕가정’ 등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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