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독일은 가톨릭교회보다 개신교가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독일의 수상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통일을 위해 가톨릭교회가 국가에 종속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톨릭교회는 억압 당했고, 특히 수도회에 대한 압박과 견제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1844년 2월 4일 스위스 루체른 군츠뷜에서 태어난 안드레아스 암라인(Andreas Amrhein) 신부는 어린 시절부터 외방 선교를 희망했다.
그는 6~9세기 베네딕도회 수도원들의 북유럽 선교와 문화적 선도에서 영감을 얻어, 아직 그리스도교가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선교하길 꿈꿨다.
암라인은 1870년 독일 보이론 연합회의 베네딕도 수도원에 입회해 이듬해 서원을 하고, 1872년 7월 16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성 베네딕도의 수도 정신에 자신의 선교 이념을 접목시켜 ‘수도승적 규율 준수와 선교사’라는 당시로서는 특별한 수도 생활양식에 대한 인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12년의 노력 끝에 외방 선교를 위한 베네딕도회의 설립 허락을 받은 그는 1884년 남자 베네딕도 수도회를, 1885년에는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를 설립했다.
수녀원은 증가하는 지원자들로 새로운 자리를 물색해야했고, 1897년 독일 남부의 소도시 툿찡(Tutzing)에 새 수녀원 부지를 마련해 정착했다. 현재의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라는 명칭은 여기에 근거한다.
암라인 신부는 선교를 지향하면서도 베네딕도회 고유의 관상적 요소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수도 가족들이 베네딕도의 규칙을 따라 살며 선교 소명에 따르는 노고와 희생 안에서 모든 일을 하고, 하느님을 만나기를 바랐다.
또한 이를 통해 주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체험하게 되길 원했다. 따라서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의 영성은 베네딕도회적 수도 삶을 통해 세상의 복음화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기도’, ‘공동생활’, ‘일’(선교활동)을 통해 표현된다.
한국 천주교회와의 인연은 1925년 독일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에서 원산에 4명의 선교사를 파견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1949년 북한 공산당에 의해 수녀들은 체포되고, 수녀원은 폐쇄됐다. 5년 동안 강제 노동을 하면서 2명의 독일인 수녀가 사망했고, 나머지 18명의 수녀들은 1954년 독일로 송환됐다. 공산 정권에 체포됐던 한국인 수녀들은 옥고를 치른 후 출감해 숨어 살다가, 그중 17명이 한국 전쟁을 전후로 남하했다.
부산에서 재회한 수녀들 중 7명은 광주 남동과 북동 본당에서 선교활동과 유치원 교육을 하고, 나머지 수녀는 대구에 정착해 1952년 남한 첫 분원을 마련했다. 1955년에는 독일로 송환됐던 수녀들이 재파견돼 대구로 왔다.
이후 발전을 거듭한 수녀회는 1987년 새 원장좌 수녀원을 지었고, 서울·인천·수원교구 분원을 중심으로 서울 수녀원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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