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 시절 존경하는 선배님들이 서품을 받고 못자리 신학교로 첫 미사를 오면 그렇게 자랑스럽고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난 언제 사제가 되어서 제단에 올라 미사를 정성껏 봉헌 할 수 있을까?라는 열망으로 타오르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입학도 같이하고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형님이 새 신부님이 되어 오셨기에 “형, 신부님이 되니까 뭐가 제일 좋으세요?”라고 질문을 했었다. “음…” 잠깐 생각을 하더니 “야! 사제 활동비 받잖아!”라고 말해서 폭소를 했던 기억이 있었다.
사제활동비는 세상에서 말하는 ‘월급’이나 ‘연봉’이 아니었다. 그저 사제로 살기 위한 활동비였다. 결국 나도 새 사제가 되어서 그 활동비를 받았기에 ‘신용카드’라는 것을 만들어 보겠다며 야심차게 은행을 찾아갔었다. 신청서에 직업란에 표시를 해야 하는데 ‘신부’란이 없어서 ‘기타’란에 직업을 표시하자 직원이 난처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저기 고객님, 연봉이 얼마나 되세요?”
“글쎄요 연봉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일 년 치를 다 합치면 한 1000만원 조금 넘을 걸요?”
그러자 더 난색이 돼 물었다. “혹시 재산세 얼마나 내세요?”
“재산세요? 재산이 없어서 내본 적이 없는데요”했더니 “죄송하지만, 저희은행에서는 신용카드를 만들어 드릴 수 없네요”라는 대답을 듣고 멍한 기분으로 은행을 나왔던 기억이 있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다른 선배 신부님과 이날 있었던 일화를 이야기 하자, “난 성직자나 기타로 표시하면 은행에서는 신용카드를 안 만들어 주길래 직업란에 ‘목축업’이라고 적었었지. 어떤 목축업을 하냐고 묻기에 ‘양’을 기른다고 했고, 몇 마리를 기르시냐고 또 묻기에 한 2000~3000수 키운다고 했더니 바로 만들어 주던데?”라는 진짜인지 농담인지 모를 간 큰 이야기에 박장대소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마음은 씁쓸해졌다. 한국사회가 평가하는 직업의 평가나 위상은 연봉과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제들을 ‘벌어먹고 살기 위한 직업’으로 분류하고 싶어 했다.
심지어는 교우집 가정방문을 하는 중에, 마흔이 넘은 아들이 노모와 함께 살고 있는 안타까운 가정상황을 파악하고는 “상황이 이러셔서 참 안타깝네요”라고 나도 모르게 위로하고픈 말씀을 드렸는데, 부러움인지 안타까운 마음이셨는지 “아이고, 그러게 말이예요. 장가도 못가고 취직도 못할 거면 차라리 신부나 되라 그럴 걸!”라고 말씀하셔서 “아이고…, 농담도 잘하셔!”라고 말하며 헛헛헛 웃고 말았다.
하지만 한동안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상처가 되어 박혀 있었다. ‘신부나’란 표현이 ‘아무거나’로 읽혔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예수님을 따라 목숨을 바칠 각오로 신부가 됐는데, 버릴 수 있는 건 다 버리고 주님만을 따르겠다며 나섰는데,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사제를 ‘직업’으로 바라보고 싶어 했다.
하긴 세상은 예수님께도 ‘자격’을 묻고 갈릴래아 출신의 ‘목수의 아들’로 불렀으니 내가 받은 상처는 예수님이 받으신 모욕에 비할 것도 안 됐다. 결국 버림과 외면 속에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하게 돌아가신 스승을 따랐으니 스승의 삶은 결국 나의 삶이 돼야 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