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양극화된 사회는 양극화된 주거문화를 만들어줬다. 한국의 아파트 주거문화는 고급 아파트와 서민 아파트라는 ‘상품가격’에 따라 시민들을 소득별 계층별로 구분해서 집단화 시켜놓았으니 바야흐로 자본에 의한 ‘신 계급사회’에 진입한 세상임을 깨닫기는 어렵지 않다.
아파트 단지로 구성된 신설 본당은 성당 부지 안에 사제관을 지을 수 없어 신부들마저 아파트에 살아야 했다.
아파트는 전통적 질서가 있는 집 개념이 아니라 효율성을 목적으로 설계된 주거공간이었다. 더구나 새로 지은 아파트는 복도가 없었다.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거쳐 바로 방으로 들어가니 이웃집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고 위 아래층의 이웃도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동선을 따르는 구조였다. 만날 수 있는 이웃이 존재하지 않는 수직형 폐쇄 구조의 아파트는 현관문을 닫으면 커다란 금고 안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성당에 나오시는 교우들도 이러한 주거문화 속에 살다보니 성당 분위기도 익명화되고 무관심화 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러한 주거 사회를 설계한 의도는 무엇일까? 이것이 그토록 기다려온 21세기의 미래사회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방문을 열면 바로 찬바람과 하늘을 만나고 마당이 있었던 수평주거 문화가 그리워졌다. 마을길과 골목길을 따라 집들이 늘어선 자연적 수평사회는 같은 길을 공유하는 ‘평등’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사회였다. 그 길에서 철수와 영희네 집을 만나고 그 집의 가족을 만나 인사하고 안부를 나누며 길과 함께 삶을 공유했다.
공간의 효율적 이용을 위해 수직으로 짐을 쌓아놓은 창고형 대형마트보다 수평적 전통 시장이 편안한 건 활기찬 대화와 삶의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장 골목과 길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파트는 편리함이라는 ‘효율성’의 대가로 이웃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엘리베이터는 밀폐된 이동수단이지 길이 아니었다. 길이 없어졌으니 ‘동구 밖 과수원길’을 따라 걷는 낭만도 없어졌다.
아파트는 설계자와 시공자가 상품으로 만들어 놓은 인위적 구조에 좋든 싫든 맞춰 살아야 하는 고정된 사회구조였고, 그 이후의 구조변경은 불가능한 주거사회였다. 시장의 요구에 따른다 하더라도 설계자는 우리의 주거사회를 이웃이 없는 익명의 사회를 지향하도록 만든 것일까?
새롭게 조성되는 신도시마다 성당을 지을 수 있는 종교부지는 혐오시설도 아닌데 왜 항상 도시의 맨 구석으로 내몰려 계획되어야만 할까? 우리시대 도시의 중심에는 늘 사고 팔고 먹고 노는 ‘상가와 유흥가’만 가득해야 할까?
결국 끝없는 이기심과 탐욕을 충족시키려는 ‘생각의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도시도 사회도 바뀔 수 없을 것이다. 편리함과 이윤과 효율성의 가치로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공동체성과 인간애와 평등이라는 영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공동선’으로 설계한다면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워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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