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리구의 중심 평택본당(주임 민경국 신부)은 평택지역 복음화의 살아있는 역사다.
평택에 본당이 설립된 것은 1928년의 일이지만, 평택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우리나라에 신앙이 뿌리내리기 시작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례자로도 유명한 이승훈(베드로)은 1791년 평택 현감으로 평택땅에 발 디디게 됐다. 현감으로 재임하는 동안 현감 처소인 객사리에서 40리 가량 떨어진 대추리까지 찾아가 전교했다고 전해진다.
이승훈의 현감 재직기간은 짧았지만, 그는 평택지역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유교를 중시하던 당대에는 한 고을의 수령이 공자의 묘에 절하지 않는 것은 대역죄에 해당했다. 하지만 이승훈은 “천주 이외의 다른 귀신을 제사하지 않는다”는 평소의 믿음에 따라 문묘에 절하지 않아 평택 지역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후 평택지역은 박해시대에도 교우촌이 이어져 공소로 발전했다. 간석지를 개간해 살아가던 길마원공소, 교우들이 모여 살며 활발한 공동체를 이뤄 낙촌(樂村·즐거운 마을)이라고도 불리던 통복리공소, 옹기를 굽던 인광리공소 등이 이런 공소들이다.
평택지역에 신자들이 증가하자 본당 초대신부인 몰리마르 신부는 평택에 땅을 매입하고 본당을 설립할 준비를 했다. 비전리 야산이 새 성당의 터전이 됐다. 교우촌으로 많은 신자들이 활발한 공동체를 이루던 곳은 통복리였지만, 역에서 가깝고 읍내가 내려다보이는 비전리가 성당으로서 최적의 입지를 갖추고 있어 새 성당 터전으로 선택됐다.
1928년 설립된 본당은 전교활동에 착수했다. 각 공소공동체가 활성화돼 있었지만, 정작 성당과 가까운 평택읍내에는 신자들이 극소수였다. 본당의 16개 공소 신자들은 교통 불편으로 매주 성당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각 공소가 활발히 전교한 결과 대축일에는 성당마당에까지 신자들이 서서 미사를 거행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으로 본당 설립 10년 만에 서정리에 본당을 신설할 수 있었다.
시대에 따른 어려움도 많았다. 일제강점기에는 본당신부가 연금상태가 되는 등 신앙활동에 제약이 있었고, 6·25전쟁시기에는 본당주임을 맡았던 사제들이 고초를 겪거나 순교하기도 했다. 초대주임인 몰리마르 신부도 이때 순교했다.
본당은 여러 역경 속에서도 사제·수도자를 배출하고 평신도 신심단체를 활성화 시키는 등 내외적으로 신앙을 키워나갔다. 특히 소외된 어린이들을 위한 활동에도 힘써 고아원, 보육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현재 평택대리구 중심본당으로 지정된 본당은 신자 수 3700여 명에 이르고 유치원, 공부방 등을 운영하며 어린이를 돌보는 등 활발한 사목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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