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거의 매일 꼬맹이 손자를 데리고 오는 어떤 할머니 한 분이 계십니다. 성전 맨 앞자리에 앉으시는 할머니는 손자에게 무언가를 하나씩 설명해 줍니다. 그러면 아이는 해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들었다는 표현을 합니다. 참으로 정겨운 장면입니다.
그리고 순례 미사가 시작되면 할머니와 손자는 겸손하고 정성껏 미사를 드립니다. 그 모습을 제대 위에서 보고 있으면, 내 자신이 더 정성껏 미사를 봉헌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정성을 다하는 전례 생활을 통해서 기쁘게 성숙하는 모양입니다.
새남터 성지에서는 월요일과 금요일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안수 예절이 있습니다. 그때 안수를 받으러 나오시는 순례자들의 모습은 경건함 그 자체입니다. 그 경건함 사이로 할머니와 손자도 안수 예절이 시작되면 안수를 받으러 나옵니다. 꼬맹이 먼저 안수를 한 후에 할머니에게 안수를 줍니다. 그러면 먼저 안수받은 꼬맹이는 할머니의 바지를 꼭 붙잡고 있다가, 할머니 끝나면 같이 손잡고 성전 문밖으로 나갑니다.
그렇게 안수 예절이 다 끝나고, 제의를 갈아입고 성지 마당으로 가면 할머니와 손자는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나에게 다가와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몇 번씩 하고, 손자도 배꼽 인사를 합니다. 어찌나 마음이 훈훈해지는지!
그런데 어느 날인가, 할머니만 순례 미사에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사 후에 할머니를 뵙고 인사를 드리며,
“할머니, 오늘은 어떻게 손자 없이 혼자 성지에 오셨어요?”
“아, 우리 손자, 오늘은 뭐 지 애비, 애미가 보는 날이에요. 아차, 그리고 신부님 이거, 이것 좀 받아요!”
그리고 할머니는 가방 속에서 깨끗한 봉투에 뭔가를 담아왔습니다.
“이게 뭐예요? 할머니, 혹시 봉투에 돈이 들었어요? 그럼 저 절대로 안 받을래요. 이런 것 받으면 교황님께 크게 야단맞아요.”
그러자 할머니는 손자와 똑같은 표정의 환한 웃음으로,
“이히, 무슨 교황님이 야단을. 이거, 신부님, 안수 값이에요. 안수 값. 우리 손자를 볼 때마다 신부님이 안수해 주시고, 머리도 쓰다듬어주시고, 예뻐해 주시는데 이 할미가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거 안수 값이라고 생각해서 받아 주세요. 만약에 안 받는다면, 돈이 작아서 그런 줄 알고 다음에 더 많이 가져오리다.”
“아니, 할머니…”
살짝 봉투에 담긴 돈을 보니, 5천 원이었습니다. 순간, 이 정도의 돈은 할머니가 아주 기뻐할 수 있도록, 즐거운 표정으로 받으면 이 할머니가 좋아하겠다 싶었습니다.
“아니, 이렇게 큰돈을. 손자 보느라 하루 종일 수고했다고 받은 돈일 텐데. 암튼 할머니 이렇게 큰돈은 오늘만 받을 테니, 다시는 이러지 마세요.”
할머니는 뿌듯한 표정과 기쁘고 환한 얼굴로 성지 밖을 나섰고 나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습니다. 손자의 아빠, 엄마가 어렵게 살다 보니 생활비조차 못 받고 있는 할머니. 그러기에 5천 원은 그 할머니의 하루 생활비를 넘는 금액일 수 있습니다. 정말 너무나도 큰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내 곧 성지 마당 옆에 있는 초봉헌함으로 가서 그 할머니와 손자를 지향두고, 5천 원어치 컵 초를 사서 봉헌했습니다. ‘주님, 저 할머니와 손자, 그리고 할머니 자녀들에게 당신 은총을 청합니다. 그저… 은총을 청합니다.’ 그 날, 생애 너무 큰돈을 받고, 가슴 벅찬 하루를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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