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서정동본당(주임 이승제 신부)은 모 본당인 평택본당과 함께 평택지역을 복음화 시켜온 본당이다. 본당은 복음화와 더불어 학교·유치원 등 교육사업에도 활발하게 참여해 왔다.
서정리(현 서정동)에 공소가 생긴 것은 당시 평택본당 주임으로 있었던 몰리마르 신부의 관심 때문이었다.
서정리에는 천주교 신자의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옹기를 굽던 이가 신자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충청도를 비롯해 여러 지방에서 옹기를 굽던 많은 교우들이 모여 살면서 점말(점촌)이라 불렸다.
주민의 절대 다수가 신심이 깊었고 단합이 잘돼 본당신부가 방문하는 판공 때면 모두 일손을 놓고 잔치를 벌이곤 했다.
몰리마르 신부는 서정리에 본당을 설립하기 위한 준비로 1934년 서정리에 사제관을 짓고 미사를 거행했다.
그는 미사를 준비하면서 신자들을 장터로 보내 “성당에 큰잔치가 있으니 누구나 와서 음식을 먹으라”고 선전을 하게 했다고 한다.
서정리에는 이미 1920년 감리교회가 있었지만, 이 초대에는 개신교 신자들도 호의적이었다. 이장과 개신교 신자들의 협조로 서정리역과 가까운 곳에 성당 터를 살 수 있었다.
1934년 완공한 본당의 첫 성전은 고딕양식으로 지어졌다. 몰리마르 신부의 개인 재산과 프랑스 신자들의 후원으로 지어진 성당은 60년 가까이 미사를 봉헌하는 하느님의 집으로 사용됐다.
6·25 전쟁이 끝나고 피난민들은 고향을 찾아 돌아왔지만 당시 본당지역은 교육의 불모지였다. 청소년은 물론이고 성인마저도 문맹자가 많았고, 일부 주민들은 자제를 서울이나 수원으로 유학을 보내는 실정이었다.
1952년 본당 주임으로 온 류수철 신부는 사제관에서 대학생 봉사자들과 함께 소년들을 모아 수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어 본당은 1953년 학교 인가를 받아 복음정신을 바탕으로 효명고등공민학교를 개교했다.
사제관을 헐어 교실을 만들어 쓰던 학교는 가톨릭신자인 미군 장병들의 모금과 신자들의 노력 봉사로 교사를 건축했고 1954년에는 효명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인가를 받았다. 10여 년 동안 본당 경내에 있던 학교는 1964년 장당동으로 이전했지만, 본당과 학교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본당은 유아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80년대부터 유아를 교육해온 본당은 1992년 본당 부설로 소화데레사유치원을 설립했다.
새 성당 완공을 앞두고 있던 본당은 옛 고딕성당을 유치원 건물로 삼았고, 현재도 고딕성당의 외관을 유지한 채 유치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본당이 외적으로 다양한 사업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공동체가 내적으로 충실했기 때문이다. 이미 1960년대에 3000명이 넘는 신자로 교세를 확장한 본당은 오산·송탄·송서·궁리·송현본당 등의 신설에 따라 구역을 분할해왔다.
현재도 4000명이 넘는 신자 수로 끊임없이 활발하게 지역 복음화를 위해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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