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유물 전시관’에는 조금 특이한 유물이 있다. 낡아서 뒤축이 헌 구두와 양말이다. 이 구두와 양말은 그가 선종한 지 30년 만인 2001년 8월 3일 그의 묘소를 용산 성직자 묘지에서 인보성체수도회 용인수도원으로 이장할 때 그 안에 남아 있던 것이다. 윤을수 신부가 이 세상을 떠날 때 평소에 고무신을 즐겨 신었던 그의 발에 신겨졌던 구두와 양말이다. 그리고 전시관 한쪽에는 길 떠날 채비가 다 돼 있는 느낌을 주는 낡은 여행가방과 지팡이, 검은 장갑이 놓여 있다. 윤 신부가 1971년 1월의 어느 추운 겨울날 병이 깊어져 미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오직 편안히 죽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올 때 지녔던 물건들이다. 낡은 구두, 양말, 가방과 장갑, 손때 묻고 무뎌진 지팡이…. 윤 신부의 손과 발, 인생의 마지막 시기와 관련된 물건들이다. 귀국하는 그를 김포공항에서 맞이한 유일한 사람인 그의 조카가 전해 준 바에 의하면, 그 가방을 열어 보았더니 오래전부터 사용한 타자기 하나, 몇 개의 원고 뭉치가 전부였다고 한다. 윤을수 신부는 이렇듯 죽음에 임박한 상황에 돈 한 푼 없으면서도 ‘어떻게든 될 것’이기에 생활에 관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돌아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찾아온 동창 신부들을 향해 여전히 유쾌한 유머를 날리는 낙천적이고 고매한 기질의 그를 두고 오기선 신부(1907~1990)는 바오로 사도처럼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 9,22)이 돼 살았던 사람이라고 추억했다.
생전의 윤을수 신부는 수없이 길을 떠나고 돌아오는 삶을 살았다. 그 여정의 성격은 참 다양했다. 어렵고 힘없는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늘 잰 발걸음을 해야 했고, 나환자 정착촌 건설 현장, 피난민들의 정착을 위한 간척 사업 현장 외에도 브라질 이민 사업을 위한 시찰 등 사회사업 관계의 국제회의와 기타의 일로 1년이면 몇 차례씩 해외를 왕래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단 하나, 이 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방방곡곡에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와 그분 나라의 승리를 전하고 그 사랑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에게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허위의 신앙생활이었다. 그런 그의 여정에 늘 가까이 함께했던 것이 지팡이다. 이러한 윤을수 신부의 활동 모습을 생생한 증언으로 남긴 사람이 있다. 바로 ‘사도법관’ 고 김홍섭(바오로) 판사(1915~1965)다. 그는 윤 신부가 세운 한국 최초의 사회사업학교인 구산후생학교 설립에도 참여했고 그 학교 학생들에게 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1958년 윤 신부가 9명의 의과대학생들과 5명의 구산후생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순회 진료팀을 이끌고 해방 이후 중앙정부의 과장급 하나도 찾아온 적 없는 연평도로부터 소청도, 대청도를 거쳐 백령도에 이르는 서해 도서 지방을 찾아다니며 난민 대책을 위한 사업과 의료 봉사활동을 펼쳤을 때 동행했다. 그는 그의 저서 「무상을 넘어서」에 이 전교여행의 소회와 윤 신부에 대한 기억을 남겼다. 크지 않은 몸집에 보릿짚 모자, 고무신을 신은 윤 신부의 검은 지팡이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봉사단의 움직임도 분주해졌다고 한다. 지팡이는 윤 신부의 지휘봉과도 같았던 것이다.
윤을수 신부는 지병인 당뇨병으로 인해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이 지팡이는 그가 산을 개간하고 나무를 심을 때에는 줄자로 쓰이고 땅이나 집터를 잴 때, 정원이나 밭 등을 만들 때도 정확하게 평수를 계산하는 역할을 했다. 김홍섭 판사는 윤 신부가 인천보다 중국의 산동이 더 가깝다는 외딴섬의 쓸쓸한 촌락들을 찾아다니면서 모처럼 치료혜택을 받고 무표정하게 돌아가는 아낙네, 아이들, 노인들의 뒷모습을 보고 눈물짓곤 하던 모습을 전해준다. 그런 그의 모습 위로 남과 같이 울어줄 수 있고 남과 같이 웃어줄 수 있는 동정의 마음이 자비라고 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겹쳐진다.
유물 전시관 안쪽 벽에는 윤 신부의 마지막 인생 여정과 관련된 유물이 하나 더 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가 입었던 한복이다. 윤 신부는 우리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가 설립한 인보성체수도회 수녀들의 수도복으로 치마와 저고리를 입게 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 당시 수녀들은 그러한 그의 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제대로 된 정식 수도복을 입게 해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그러면 윤 신부는 늘 수도복이 수녀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수도복 때문에 돌 맞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고 일러주곤 했다고 한다.
윤을수 신부의 우리 전통적인 것에 대한 애정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 초창기 수녀들이 들려준 재미난 일화가 하나 있다. 윤 신부는 1960년대 초반 인보성체수도회 설립자이면서도 외국의 다른 수도회 지원자들도 모집해 인보성체수도회 안에 함께 살다가 비자가 나오면 보내곤 했다. 그때 그 지원자들에게 꼭 한복을 준비하게 했다고 한다. 비행기가 미국 공항에 착륙할 준비를 하면 한복으로 갈아입게 했는데 20여 명의 젊은 아가씨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차례로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주변 사람들의 감탄과 카메라 플래시를 한몸에 받아 몸 둘 바를 몰랐다는 것이다.
유물 전시관을 나와 수도원 옆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면 양지바른 산기슭에 윤을수 신부와 인보성체수도회 수녀들이 묻혀 있는 묘역이 있다. 윤 신부는 1971년 5월 9일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그가 에오라지 추구했던 영원한 행복, 어버이 하느님의 품에 들었다. 그는 하느님 품에 들어 지금도 이 시대 가장 어려운 이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위해 전구하고 있다.
※문의 031-334-2901~2 인보성체수도회 용인수도원
※ 이번 호로 ‘박물관 문화 순례’ 연재를 마칩니다. 지금까지 수고해 주신 필진들과 애독해 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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