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우리 신앙선조들과 도자기가 얼마나 깊이 연관돼 있었는지 알려준다. 박해시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신자들의 생계를 이어준 것이 바로 도자기였다. 그런 인연 때문일까 도자기의 고장 이천에는 신앙선조의 발자취가 많다. 용인대리구 이천본당(주임 이승준 신부)은 신앙선조의 역사를 기리고 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길을 걸어왔다.
점토와 물, 나무가 풍부한 이천은 우수한 도공(陶工)의 맥이 끊이지 않는 고장이었다. 그래서 이천 지역에는 박해시기에 옹기를 굽던 신교우촌이 많이 생겨났다. 백사면 모전리, 모가면 소고리, 마장면 이치리, 대월면 고담리 등이 일명 ‘점촌’이라 불리던 교우촌이 있던 자리다. 모전리와 소고리 등에는 아직도 지명에 ‘점촌’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이천지역 본당 창립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당시 남곡리본당(현 양지본당) 주임이었던 박동헌 신부의 전교덕분이었다. 당시 천주교 신자가 거의 없던 이천읍내에 전교를 시작한 박 신부는 1938년 이천읍에 공소를 열었다. 공소는 설립 2년 만인 1940년 이천읍 중리의 민가 한 채를 사들여 성당으로 삼았고 이듬해 박 신부가 주임신부로 부임하면서 중리본당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
박 신부의 열정적 사목은 이천지역 신자 수를 급증시켰다. 설립 당시 30여 명 신자로 시작한 본당은 1945년에는 신자 수가 1363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이천본당의 선교행진은 70년에 걸쳐 계속됐다. 70년 동안 6개의 본당을 분가시켰고, 현재도 4200여 명의 신자가 이천본당에 적을 두고 있다.
본당은 이천지역의 성지를 개발하는 데도 앞장섰다. 바로 어농성지와 단내성지를 조성한 것이다.
1987년 발족한 이천성지개발위원회에는 본당 주임이었던 배영무 신부를 중심으로 이천본당 출신 사제와 본당 신자들이 참여했다. 위원회는 단내성지에 이천 출신 순교자인 이문우(요한), 이호영(베드로), 이조이(아가다), 정은(바오로)의 순교비를 세우고, 어농성지에 복자 윤유일(바오로)와 복자 주문모(야고보)의 동상을 건립했다. 이후에도 두 성지에 성당과 사제관을 짓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 이천본당의 성전은 1993년 봉헌된 성당이다. 신앙선조의 역사를 소중히 여겼듯이 본당은 본당의 역사도 소중히 여겼다. 1959년 봉헌된 옛 성당의 벽돌을 일부 새 성전에 사용한 것이다. 성전의 제대 뒤편과 입구 화단 등에서 옛 성당의 붉은 벽돌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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