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누이 같다. 30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는 참 닮아있었다.
스무 살,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 때문에 휠체어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중증장애인 남편. 대학 입학을 앞두고 일어난 사고로 뇌를 다친 후 반신불수가 된 아내.
아픔을 가진 경상도 청년과 서울 아가씨가 만나 서로의 손과 다리가 되었다. 젊음은 가고 이젠 늘어난 흰 머리카락과 깊게 파인 주름살…. 고비 고비 넘기며 사랑도 단단해졌다.
성탄절을 앞둔 12월 햇살 가득한 날, 따사로운 햇살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배견(알비노·64·김천황금본당)-조순자(마리아·52)씨 부부를 만났다.
#오늘은 사랑 - 많은 딸들과의 인연
김천 조마면 신안2길 178 ‘나눔공부방’. 이들 부부의 보금자리며 다문화가정 여성들을 위한 한글공부방이다. 매주 화요일이면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일본에서 온 여성들과 아기들로 북적북적 댄다.
찾아간 날, 성탄트리를 만드느라 분주하다. 마당 한쪽에선 장작불 위로 솥 한 가득 닭볶음탕이 보글보글 끓고…. 공부방 겨울방학식 겸 작은 파티가 열린다.
“좀 제대로 해봐. 이렇게 하면 트리 장식이 다 떨어진단 말이야.” 아내 마리아씨가 호통 친다.
성탄트리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공부방에서의 추억을 담은 사진들이 달려 있다. 봄 소풍가던 날, 장 담그던 날, 생일 파티 하던 날, 음식 나눠 노인정에 돌리던 날….
우연히 동네 시집온 필리핀 새댁을 만나 한글을 가르쳐주던 것에서 시작한 나눔공부방. 2007년 12월 25일 문을 연 이곳은 이번 성탄절에 여덟 번째 생일을 맞았다.
“한글이야 어디 간들 못 배우겠어요? 다른 나라에서 시집온 여성들에게 한국에 대해서 알려주고, 잘 적응하도록 돕는 것이 제가 하는 일이죠.”
남편 알비노씨는 학생들에게 하나하나 일러주며 바삐 다니는 마리아씨를 바라보며 말한다. “마리아가 열정이 넘쳐요.” 경상도 남자 특유의 단답형에 무뚝뚝한 말투지만, 눈빛에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묻어난다.
다문화가정 새댁 한글공부방이며 동네 사랑방인 이곳은 부부가 직접 운영한다.
“기관에 등록하면 지원도 받고 여러 이점도 있겠지만,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못하게 되니깐…. 그저 마음 편하게 와서 한글도 배우고 이야기도 나누는 그런 곳이 됐으면 해요.”
#어제는 고통 - 그대는 나의 손, 나는 그대의 다리
시골로 시집온 서울 아가씨는 많이도 울었다. 3년 펜팔 끝에 사랑하게 된 남자 하나 믿고 왔는데, 살가운 말 한마디는커녕 무뚝뚝하기만 했다. 새벽에 일어나 아궁이 불 때며 밥지어야했던 시절, 몸이 성치 못해 서러웠고, 사람들의 시선에 힘겨웠다. “저런 남자한테 와 시집을 왔노. 저러다 곧 도망가겠지.”
그래도 남편에게 쓰인 콩깍지는 아직도 여전하고, 그 사랑으로 긴 고통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다. 마리아씨 도움 없이는 휠체어에 앉지도 못하는 알비노씨. 어느 날, 마리아씨가 병이 나서 꼼짝도 할 수 없게 됐다.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기력을 잃어갔다. ‘이러다 죽는구나.’ 정신이 번쩍 든 아내는 겨우 기어가 물을 떠다 마시며 기운을 차렸다. 남편을 돌볼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에 더 힘을 냈고, 더 밝게 웃었다.
“우리는 떨어뜨려놓으면 아무 것도 아니에요. 서로 손과 발이 되어 한 몸이 돼야 완벽해지는 것처럼. 정말 부부는 일심동체인 것 같아요.”
쉰을 넘긴 아내는 지금도 남편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아침에 눈뜨면 ‘사랑한다’고 남편하게 말해요. 나한테도 말해달라고 계속 조르곤 하는데, 대답 안 하는 거 있지.”
마리아씨가 눈을 흘기자 알비노씨는 고개를 돌린다. 계속 사랑한다고 해달라고 조르고 졸라 겨우 듣는 대답은 “어~엉.” 이 짧은 말에도 아내는 행복하다.
지난 12월, 부부의 이야기를 엮어 「그대는 나의 손 나는 그대의 다리」(홍익포럼)를 냈다. 2002년 낸 첫 번째 책에 살을 붙여 다시 편집해 내는 데, 당시 본당 주임으로 인연을 맺은 전재천 신부(현 구미 상모본당 주임)가 도움을 줬다. 잔잔하게 가슴 울리는 그들의 삶을 느낄 수 있다.
#내일은 희망 - 오늘보다 아름다운 내일을
“1월 1일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오늘, 우리는 함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미사를 다녀오면서 두 손을 꼭 잡았습니다. 더 많이 사랑하면서 올 한해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을 가정을 만들자는 무언의 약속과 함께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오늘부터라도 사랑하는 아내에게 한 마디 이상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을 소리 내어 해봐야겠습니다.”(‘배 알비노의 글’ 61쪽 중에서 정리)
성탄트리를 꾸민 후 옹기종기 둘러앉아 점심을 나눈다. 이들 부부 책이 나온 것을 축하하며 ‘펑’ 샴페인도 터뜨린다. 밥상 하나로 시작된 공부방, 친구들 데려오면서 밥상 2개…, 그렇게 늘어난 밥상엔 제법 많은 학생들이 함께 한다. 수 십 명의 딸들과 인연을 맺은 것. 장애로 주저앉기보다 희망을 찾아 나선 이들 부부가 만든 작은 기적이다. 오늘도 희망 일구기는 진행형이다.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는 부부의 사랑 안에서.
“가정생활도 성소에요. 가정을 잘 지키는 것도 주님을 따르는 길이듯 말이죠. 누군가의 희생 없이 가정은 행복해질 수 없어요. 나를 내어주며 더 사랑하는 것… 그게 부부 아닐까요.”
“마리아가 잘해줘서 고맙죠. 지금까지 함께 살아준 것도.”
알비노씨의 말을 들으며, 마리아씨가 한마디 한다. “사랑한다고 한번 말해 봐요.”
“갑자기 뭘…. 허허.” 쑥스럽게 웃는 남편에게서 속 깊은 사랑이 느껴진다.
올 한 해, 서로 손과 다리가 돼 오늘보다 아름다운 내일을 써갈 부부. 그들의 미소가 햇살처럼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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