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근지역은 우리나라에 신앙의 씨앗이 뿌려지던 시기부터 신앙이 이어 내려오던 곳이다. 한국교회의 요람이라고도 불리는 이 양근은 오늘날 용인대리구 양평본당(주임 이재열 신부)이 자리한 곳이다.
양평지역에서 최초로 입교한 이는 바로 권일신(프란치스코)이다. 이벽(세례자 요한)의 권유로 입교한 권일신은 자신만의 신앙에 그치지 않고 온 가족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는 가족에 이어 고을 전체에 신앙을 전하는 등 전교에 열성적이었다.
하지만 박해시기를 거쳐 양평은 순교의 현장으로 변모했다. 연이은 박해로 양평에는 겨우 명맥만을 유지할 정도로 교세가 크게 약화됐다. 하지만 박해가 끝나고 한불조약(1886년)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되자 양평 능말에 끝까지 숨어있던 교우들을 중심으로 공소가 형성됐다.
1888년 풍수원본당 초대주임을 맡은 르메르 신부가 양평의 공소를 돌봤고, 당시 조선대목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도 양평 지방을 지나며 신자들과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본당은 1943년 오연희 신부가 양평에서 사목하면서 본당으로 승격됐다. 오 신부는 양평읍내의 민가를 구입해 성당으로 삼았다. 그러나 본당은 설립 후 얼마 안 있어 6·25전쟁을 겪었다. 이 전쟁에서 성당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성당을 잃은 공백기를 지나 1952년 김정진 신부가 본당에 부임했다. 성당이 없던 공동체는 3대 사목회장인 민병원 회장의 집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새 성당 마련을 꿈꿨다. 마찬가지로 파괴된 용문성당의 벽돌과 신자들이 직접 만든 벽돌과 시멘트, 봉헌금으로 1953년 지금의 성당 터에 280㎡가량의 새 성당을 세울 수 있었다.
피난의 끝에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신자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성당 봉헌을 위해 노력했다. 이런 모습이 지역 주민들에게 감동을 줬고 입교자가 늘어나 1956년에는 신자수가 1600여 명에 달했다.
하지만 새 성당은 30년도 채 안돼 신자들과 작별을 고했다. 누전으로 전소됐던 것이다. 본당 신자들은 성당을 잃은 슬픔에 통곡했지만, 이 시련은 오히려 본당이 더욱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성당을 복구하면서 신앙심을 키우고 더욱 일치해 본당 공동체가 활성화 됐기 때문이다.
지금의 성당은 1981년 복구한 성당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성 정하상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는 본당은 본당설정 70주년을 맞아 성당 마당에 본당 신자가 디자인한 정하상 성인상을 세우기도 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