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많은 기적들 가운데 일곱 개 기적만을 전해 줍니다. 이 기적들은 모두 예수님의 신원을 드러내어 주는 표징으로 그 중 첫 번째 표징이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입니다. 무엇이든 처음 나오는 것이 중요하듯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는 요한 복음서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기적 이야기를 처음 읽으면 곤란에 처한 신랑 신부를 위해 성모님께서 청하자 예수님께서 들어주신 이야기로 들립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을 읽을 때는 요한이 이야기하는 방식이 매우 독특하다는 점을 의식해야 합니다. 요한은 혼인 잔치에서 일어난 사건을 담담하게 전하는 듯 보이지만, 그 이야기 곳곳에 상징적인 요소들을 담아 둔다는 사실을 놓치면, 요한이 본래 전하려는 메시지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대개 구약 전통의 다양한 요소들을 바탕에 깔고 상징적이며 중의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데, 오늘 기적 이야기에 나오는 상징적이고 중의적인 표현들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오늘 복음에 나오는 혼인 잔치라는 주제입니다. 구약 성경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계약을 혼인 계약에 비유하곤 합니다. 이 점은 오늘 1독서의 이사야 예언서에서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이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부인이기 때문에 혼인 잔치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 이외에 다른 것에 빠지게 되면 하느님을 버리고 다른 이와 간음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혼인 잔치에 빠져서는 안 될 요소가 있는데 바로 포도주입니다. 구약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은 주님의 심판, 곧 주님의 날이 다가왔다는 의미입니다(신명 28,39 아모 5,11). 포도주가 떨어지면 더 이상의 잔치는 불가능해집니다. 성모님이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씀드린 것은 이제 주님의 날이 다가왔음을 이야기하는, 그래서 포도주를 다시금 넘쳐흐르게 해 달라는 간청으로 보입니다.
실제 아모 9,13은 주님의 날이 오면 새로운 포도주가 흘러넘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포도주가 흘러넘친다는 것은 메시아 시대의 상징이며,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보면 ‘포도주가 없다’는 성모님의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일종의 신앙 고백으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포도주를 만들어 줄 수 있는 메시아이며, 지금이 바로 포도주를 만들어 줄 때라는 일종의 간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말씀에 예수님은 아직 당신의 때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때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때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기적에서도 그러하듯 메시아 시대의 기쁨을 미리 맛보여 주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이미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잘 알고 계셨던 성모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그 기쁨을 맛볼 수 있을지 사람들에게 알려주십니다.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이 말씀 안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할 때에만 비로소 참된 포도주를 맛보게 될 것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할 때마다 메시아 시대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복음서의 대가 가운데 하나인 킬 갈렌 신부의 해설을 나름대로 각색한 것입니다(「최고의 성지 안내자 신약성경」, 염철호 옮김, 바오로 딸, 2012, 50-55 참조). 이런 식의 해석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억지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 복음사가가 지니는 표현의 특징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설명입니다. 오늘 복음 내용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통해 메시아 시대가 열렸음을, 또 그것을 처음으로 알아보고 고백한 분이 성모님임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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