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신앙선조들이 하느님을 배우기 위해 넘었던 앵자산이 자리한 여주. 용인대리구 여주본당(주임 설종권 신부)은 순교자들이 피 흘리며 신앙을 지킨 이 땅에 공동체를 이루며 자리잡았다.
일찍이 신앙선조들은 천진암과 주어사를 찾아가기 위해 여주 지역을 지나갔지만 이것이 여주지역 신앙전파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는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1801년 신유박해부터 여주 지역에서 신자들이 붙잡히고 순교한 기록을 볼 때 박해시기에 이미 신자들이 여주지역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으로 확인된 여주지역 순교자만도 11명에 이른다. 본당은 순교자들이 부활잔치를 벌였던 양섬과 순교한 비각거리에 기념비와 현양비를 세우고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있다.
여주지역 신앙여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박해시대부터 이어오는 공소들과 부엉골 신학교다. 여주 북내면 중암리의 완장이공소와 강천면 도전리의 원심이공소 등은 여주지역의 초기 신앙을 이끌던 주역이었다.
아직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던 1885년에는 강천면 부평리의 부엉골에 신학교가 설립되기도 했다. 신학교는 불과 2년 후 서울 용산구 원효로로 이전했지만, 신학교에 상주하던 사제의 사목활동으로 여주지역에 신앙이 깊게 뿌리내릴 수 있었다.
본당이 설립되던 1950년 당시, 성당이 자리한 여주읍내에는 천주교 신자라고는 3세대뿐이었다. 지역은 여주읍에 위치했지만, 여주지역 공소 중 오감·독바위·학동공소가 본당 공동체의 모체가 됐다. 본당 설립의 기쁨도 잠시, 본당은 주임신부가 부임한 지 2달 만에 6·25전쟁으로 군종신부로 파견되면서 다시 3년 동안 공소가 됐다.
1953년 휴전 이후 다시 주임신부가 파견됐다. 본당은 마라우고개의 한옥을 구입해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전쟁으로 지역이 폐허와 다름 없었다. 이에 지금의 성당 터인 하리에 1000여 평의 대지를 매입하고 주한미군의 원조와 신자들의 노력으로 1954년 성전을 건립할 수 있었다. 이때 본당 신자는 3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본당은 성전신축과 함께 유치원도 세웠다. 당시 여주에는 유치원이 없었기에 성당 건축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도 원아들이 모였다.
본당은 유치원을 통해 ‘그리스도의 인류애’를 본받아 참 인간을 육성하고자 했다. 본당 부설 소화유치원은 지금도 여주지역의 어린이들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성장하도록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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